北에 할 말은 해야


2000124일 조선일보. 지면관계로 삭제된 부분을   여기에서는 되살리고 그를 음영으로 표시하였다.


황장엽씨 사건에 이어 대한적십자사 장충식 총재가 일본으로 잠적한 사건에 관한 보도를 보고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 이러한 일은 단순히 평양에 대한 저자세의 문제라기보다 정부 내에서 국가이념이 흔들리고 있지 않느냐 하는 의구심마저 갖게 한다.

김 대통령은 대북정책의 궁극 목적은 북한체제의 자유 민주화이고, 남북의 교류와 협력을 통하여 북한 내에 민주화 세력과 시장경제가 작동하게 되면 북한에 내부개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터이다. 다만,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밝히면 북한과의 대화가 깨지지 않을까 우려하여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이라고 우리는 이해하고 있다. 말하자면 “외교적 편의” 때문에 할 말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할 말을 하지 못하는 데에는 두 가지 허점이 있다. 첫째로 김 대통령의 침묵은 이미 그 효력을 상실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외지 보도에 따르면 평양은 김 대통령이 “조국통일이라는 구실 하에 여러 가지 형태의 햇빛정책을 실시하고 있으나 사실은 우리 공화국을 현혹하기 위한 기만술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남한의 야당과 지식인, 그리고 국민대다수가 통일은 자유 민주를 위한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평양이 모를 리 없다. 그렇다면 정부가 침묵을 지키던 않던, 평양의 인식에는 차이가 없는 것이고, 그럴 바에야 차라리 통일에 관한 남한 국민들의 소망을 솔직히 대변하고 "그러나 지금은 무엇 보다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 협력이 중요하다"고 하면 되는 것이다.

둘째로 정부의 침묵과 저자세에는 중요한 함축이 있다. 만약 정부의 솔직한 말 때문에 남북회담이 깨질 것이라면 차기 정권이 솔직한 말을 해도 회담은 깨질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현 정권이 장기 집권을 하지 않는 한 지금의 남북관계는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사상누각과 같은 것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평양이 남북 경제협력의 실리를 무시하지 않는 한 남쪽이 할 말을 한다고 해서 남북회담이 깨어질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우리가 처음부터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남북관계는 앞으로 정권을 초월한 견고한 기반 위에서 상호이해를 증진하고 격의 없는 협력관계를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가 외교적 편의 때문에 할 말을 못한다면 민간인의 입마저 막으려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정부가 못할 말을 야당이나 민간을 시켜 말하게 하는 외교적 수법도 있다. 그런데 거꾸로 야에서 그런 말을 하면 보수 반통일 세력으로 몰아 부치는 풍조가 있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장 적십자사 총재와 황장엽씨 사건과 같은 일 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자유민주의 통일론을 보수주의라고 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북한에도 황장엽씨와 같이 민주화를 바라는 세력이 있을 터인데 - 지하에 있겠지만- 그들을 북한의 보수주의라고 할 수 있는가? 반대로 북한에서 현 체제를 수호하는 세력을 진보주의라고 할 수 있는가? 북한의 자유 민주 사상이 남한에서는 '보수주의'가 되고 남한의 '진보주의'는 북한의 '보수주의'를 연상케 한다면 그것은 우스운 일이 아닌가? 사실인즉 남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념상의 갈등은 보수 대 진보의 갈등이 아니라 자유민주체제와 세습독재체제 사이의 대립일 따름이다.

냉전시대의 자유민주와 지금의 자유민주는 서로 달라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하기야 자유민주 개념의 바구니에 어떠한 내용을 담느냐에 따라 달라져야 할 점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 민주주의의가 독재와 인권 유린에 반대하는 입장은 달라지지 않았고 달라 질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 날 지구촌의 보편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일부 논자들은 우리에 대한 북한의 신뢰를 얻는 것이 중요하므로 남한이 일방적으로 미전향 장기수를 북송하고, 보안법을 철폐하고, 헌법을 개정하고, 국방비도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이들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평양의 신뢰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면 평양이 우리의 신뢰를 얻는 것도 중요할 터인데 어찌하여 평양에 대하여는 별로 말이 없느냐 하는 것이다. 상호주의라 하여 모든 일을 11로 주고 받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다만 화해 협력에는 상호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요컨대 대통령은 지금과 같은 난국을 수습하기 위하여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자신의 소신을 밝히고 적극적으로 국민을 계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200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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