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화운동의 역사적 意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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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9.6(화) 한국선진화포럼 출범식 강연

장소: COEX컨퍼런스센터

 


  

History is a philosophy teaching by examples-Bolingbroke

머리말

오늘 [한국선진화포럼]의 출범 총회를 갖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 포럼의 목적을 위해 기꺼이 동참해 주신 회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리며 특히 본 포럼에 출연해 주신 경제단체와 법인회원 및 개인회원 여러분께 충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제 여러분의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 본 포럼 임원들이 최선의 노력을 하는 일만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선진화운동의 기치를 높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19세기 말에는 개화운동이 있었고 해방 후에는 근대화가 강조 되었으며, 지금은 선진화가 시대적 과제로 논의되고 있습니다. 개화나 근대화나 선진화는 결국 세계 정세 변화에 적응하여 우리 민족의 발전과 번영을 추구하는 운동이었다는 점에서는 역사적 맥을 같이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이 기회에 잠시 우리 선진화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개화사상

19세기 말의 개화사상은 이 나라 근대화의 첫 걸음이었고 오늘에도 현실적 의미를 잃지 않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유민주주의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미국과 유럽에서 들어온 사상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실은 조선 후기의 실학파에서 그 단서(端緖)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즉 당시의 柳馨遠,, 李瀷, 朴趾源  金正喜 등의  실학파들은 민권사상과 자유.평등론을 펼치고 상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체제와 통상개국론을 제창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실학사상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서구적인 이념과 제도를 수용하자고 했던 개화주의의 밑 거름이 되었음은 물론입니다. 

당시 조선 후기의 보수적 정치사상은 성리학의 전통을 중시하여 중국의 명나라가 멸망하자, 조선 만이 유일한 문화국인 小中華이고 서양은 아비도 없고 군왕도 없는(無父無君) 오랑캐 나라이니 사악함을 물리치고 바른 것을 지켜야 한다는 척사위정 (斥邪衛正)의 사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하에서 개화를 추진한다는 것은 보통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한편, 개화주의 진영 자체 내에도 노선의 분열이 없지 않았습니다.  金允植, 申善 등은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되 삼강오륜(三綱五倫), 효제충신(孝悌忠信)과 같은 유교적 가치관을 보존해야 한다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주창한 반면, 金玉均, 朴泳孝, 徐載弼  등은 전통적 유학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 없고, 문벌을 폐지하고, 인재를 선발하며, 널리 학교를 설립하고 외국의 종교를 끌어들여 교화를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당시의 전제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개혁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개화주의의 목표에는 다름이 없었습니다. 한국의 철학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당시 개화주의의 기본 목표는 “허구와 관념을 배척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가치관에 입각하여 개인의 삶과 국정을 개선[1]  하는 것이었습니다. 

개혁 급진파들은 개화당을 조직하고 마침내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켰으나 “3일 천하”로 끝났고 金玉均 朴泳孝, 徐光範, 徐載弼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개혁운동으로 한말의 조정은 국제관계에 눈뜨게 되었고, 1894-96년의 갑오개혁 및 을미개혁을 단행하게 되었습니다. 학자들은 이러한 개혁은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본압력에 의한 것이라 하나 어쨌던 朴泳孝, 徐光範 등이 주도했고 봉건사회가 현대사회로 이행하기 위한 역사적 개혁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조선(朝鮮)의 정치적 무력과 일본의 침략으로 개화주의는 빛을 보지 못했고 결국 우리 민족은 36년간 일제의 식민통치하에서 신음해야 했습니다.

해방후의 실사구시 

8.15 해방 이후 남한에서 개화사상의 전통을 이어받은 대표적 정치가는 이승만 박사였습니다. 그는 이 나라의 역사적 정통성에서 벗어난 북한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실을 직시하여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하고 남한을 자유민주의 나라로 이끌었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실사구시의 노선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나라를 조상 전래의 경제적 빈곤으로부터 구출한 박정희 대통령 또한 실사구시의 지도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유민주의 가치를 모르는 바 아니나 민주주의의 경제적 기초가 없으면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경제 개발이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었고 그래서 민주주의의 경제적 기초를 닦는 것이 그의 역사적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실사구시의 참뜻

실사구시라 하면 단순한 실용주의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사구시가 단순한 실용주의와 다른 점은 그것은 국가가 직면한 최우선과제의 해결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입니다. 개화주의자들은 개인의 삶과 국정을 개선하는 것을 국가의 최우선과제로 인식했습니다. 개인의 삶에는 기본적으로 자유와 빵과 안전이 필수적인데 무릇 역사적으로 성공한 지도자는 모든 사회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 하에, 최우선 과제에 도전하여 국민의 삶을 개선하는 데에 기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떠한 고정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적인 방법으로 최우선 과제부터 해결하는 것이 바로 실사구시의 노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등소평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공산주의의 정치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시장경제 원리를 도입 함으로서 중국 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켜 국민들의 삶을 크게 개선하는 길을 열었습니다. 흑색 고양이든 백색 고양이든 쥐를 잡으면 된다는 그의 유명한 흑묘백묘론 (黑描白描論)이 실사구시 철학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저는 수일 전 IBC 포럼의 일원으로 중국 소주공업원구를 방만하여 깊은 감명, 아니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싱가포르 이광요 전수상의 주선으로 싱가포르 정부와 중국정부의 합작으로 개발한 우리의 경제자유지역과 같은 공업구인데 그 동안 대대적으로 외국 투자를 유치하여 불과 10년 사이에 초현대적인 신도시와 첨단 공업도시와 일류 대학원도시의 복합체를 건설하였고 우리나라 삼성을 포함한 세계 저명 기업들이 입주해 있었습니다.  당연히 건설 초기에 중앙 정부의 각종 규제가 외자 유치에 걸림돌이 되었고 그러자 소주 시(市)는 중앙정부에 실정을 보고하고 보다 자율적인 공단운영을 건의했습니다. 당시 북경의 국무원이 회시한 훈령 전문이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 훈령 중에는 “유리한 조건이면 우선적으로 실행하고 실사구시로 실효를 거두도록 하라”는 문구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중앙과 지방 정부의 규제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경영을 할 수 있게 한 이 국무원의 훈령이 소주의 급속한 발전의 비밀이었다고 저는 느꼈습니다.

지도자들의 고난과 비운  

불행하게도 근대화를 이끈 지도자들은 모두가 불행한 종말을 고(告)했습니다. 金玉均, 洪英植 朴泳敎 등의 개혁주의자들은 개혁을 시도하다가 살해되었고, 朴泳孝, 徐光範, 徐載弼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는데 그 후 박영효와 서광범은 김홍집 내각에 참여하여 乙未개혁을 주도했고, 미국으로 건너갔던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설립하여 개화당의 맥을 이어갔습니다. 서재필 박사 또한 역적으로 몰리게 되자 그의 부모, 아내, 형은 음독 자살했고 동생은 참형 됐으며 두 살 난 아들은 돌보는 이가 없어 굶어 죽었습니다. 이승만 박사도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에 5년의 옥고를 치려야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근대화를 추진한 지도자들의 허물 또한 없지 않았습니다. 김옥균 등의 급진주의자들은 이 나라 국권 침탈을 꾀하는 일본의 야욕을 예견하지 못했고, 일본의 영향 하에 개혁을 추진했던 박영효는 파란 만장의 고난 끝에 친일파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의 나라로 이끈 이승만 대통령은 4.19 혁명의 비극을 피치 못했고, 물질적 풍요의 터전을 마련한 박정희 대통령은 흉탄에 쓰러지고 군사독재라는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근대화 지도자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

그러면 전진과 좌절의 근대화 지도자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본인은 이 문제 역시 실사구시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나라의 역사에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있고 그 역사에서 주역을 담당한 지도자 또한 양면이 있게 마련입니다. 

 지도자를 이념적 지도자와 통치적 지도자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영국의 민주혁명의 이념적 지도자로는 존 록과  J. S. 밀 등이 널리 알려져 있고 통치적 지도자로서는 크롬웰 (Oliver Cromwell) 을 들 수 있습니다. 미국의 혁명에는 영국의 존 록의 영향을 받은 매디슨과 해밀턴 등이 이념의 지도자였고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통치적 지도자는 워싱턴과 링컨이 유명합니다. 우리나라의 이념적 지도자는 백범 김구 선생, 도산 안창호 선생 등이 널리 알려져 있고 통치적 지도자로서는 물론 이승만, 박정희 두 대통령을 손꼽을 수 있습니다.

이념적 지도자는 현실을 초월한 이상을 드높이지만 통치적 지도자는 이념을 현실에 적용하려 할 때에 엄청난 난관에 부딪치고 때로는 그 이념에 반하는 행동이 강요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영국의 크롬웰 이 그 좋은 예입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영국 청교도혁명의 지도자인 크롬웰은 국왕의 전제주의와 왕당파와의 치열한 전쟁에서 영국의 의회주의를 승리로 이끈 영웅입니다. 그는 국왕 촬스 1세를 처형하고, 왕정을 해체하고, 귀족원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언한 청교도 혁명의 중심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1653년 호민관으로 취임한 후에는 왕당파, 장로교파 그리고 급진파인 레벨러(수평파라고 하기도 함) 등 반대세력을 가차 없이 탄압하였고 전국을 11개 軍區로 나누어 군인통치를 실시했습니다. 의회주의와는 정반대의 행동입니다. 그는 1658년에 병사했는데 촬스 2세가 왕정을 복구하자 그의 부왕을 처형한 보복으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매장된 그의 시신을 파내 효수(梟首)형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Encyclopedia Britannica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그는 영국을 위대한 나라로 만들었고 그의 치적에는 질서의 확립, 경제의 재건, 종교적 관용의 실현, 교육기회의 확대, 사회 정의의 실현 등이 포함된다"

우리나라에서는 글과 말로 좋은 소리를 하는 지도자에게는 존경을 표하지만 나라의 각박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흙탕물에 뛰어든 행동의 지도자는 옷에 흙을 묻혔다 하여 지나치게 깎아 내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념의 지도자를 존경해야 하지만 동시에 행동의 지도자도 이해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톨스토이는 "이해하는 것은 용서하는 것” 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선인들의 과오를 합리화 할 필요는 없지만, 그러나 그들의 긍정적 측면을 평가하고 그들이 국가를 위해 이룩한 업적을 이어 받아 그 위에 쌓아 올리는 노력을 해야 나라가 발전할 수 있습니다.

선진화의 역사적 맥락 (脈絡)

이제 우리는 개화운동, 근대화운동의 역사적 발전 방향의 선상에서 21세기를 살아갈 수 있는 선진화운동을 전개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실은 100年 전 개화기의 문제의식과 오늘의 문제의식이 주제(主題)에 관한 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컨대 한국은 지금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의 4강의 틈바구니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이것은 한말 개화파의 고민과 같은 것입니다.

개화파들은 두 가지 진로를 제시했습니다. 하나는 자강(自强)이고 다른 하나는 식산흥업(殖産興業)이었습니다.  전자는 교육을 개혁하여 국민 대중으로 하여금 근대적인 국민의식을 지니도록 계몽하자는 것이고, 후자는 산업을 육성하여 경제력을 키우자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우리의 문제의식도 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개회기의 문제의식과 오늘의 문제의식의 주제는 같다 하더라도 지금의 선진화의 내용과 방법은 옛날과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문제 

잘 아시는 바와 같이 20세기 후반기 이후의 세계사의 조류는  (1)시장경제의 확대,  (2)정보혁명,  (3)민주화,  (4)세계화, (5)자연환경에 대한 각성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러한 조류를 타고 경제발전과 정치적민주화에 성공한 예에 속하나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문턱에서 그를 가로막는 내외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먼저 정치면에서는 후진적 정치문화로 대의정치의 운영이 난항을 겪고 있고 국회가 민주사회의 다원화를 통합하는 본래의 기능을 다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둘째로 사회면에서는 이념의 갈등, 집단적 이기주의, 계층간 지역간 격차와 대립, 노사 분규, 법치주의 이완, 국민교육정책의 방황 등이 우리를 암울케 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경제면에 있어서는 중국경제의 도약으로 우리의 전통적산업이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는데 이에 대처하기 위해 기업들이 자신의 기술을 개발하고 신제품의 시장을 개척하는 일이 쉽지가 않습니다. 수출이 성장의 버팀목이 되고 있지만 소수품목에 집중되어 있고 소재와 부품의 수입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고용흡수력이 미약하여 청년실업이 늘고 있습니다. 농업개방이 불가피한데 농업의 기업화, 과학화 요구에 적응하지 못하는 농민들은 실의에 빠져 있습니다.

민주사회의 선진화 

이러한 문제점들을 모르는 지식인은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 해결 방법은 결코 단순치 않습니다. 민주화된 오늘의 사회에 있어서는 모든 문제마다 이해관계와 견해가 대립하기 때문에 당사자들, 혹은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야 합니다. 우리 선진화 포럼은 합리적 결론의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지적인 토론의 장을 제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합리적 결론이라 하였는데 그 궁극의 기준은 자유민주와 시장경제의 원리일 수 박에 없습니다. 자유를 제도화한 것이 민주적 대의정치와 시장경제 체제인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국가이념이자 지구촌의 보편적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경제운용에는 네 가지 원칙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첫째는 자율과 경쟁의 원칙, 둘째는 공정경쟁의 원칙, 셋째는 균형과 형평의 원칙, 넷째는 시장 보완의 원칙입니다.  물론 이러한 원칙을 정책으로 구체화하는 데에는 다양한 이론(異論)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선진화 포럼은 토론을 통해 기본 원칙에 입각한 구체적 해결 방안을 도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맺음말

이제 저의 말씀을 끝내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선진화의 과제는 산적해 있습니다만 다행히 많은 단체들이 같은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고 또 과거의 경험이 길잡이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은 우리의 선인들이 직면한 것처럼 혹독한 상태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앞길에 장애물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만난을 무릅쓰고 이 나라의 선진화를 촉진하는 역사적 사명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특히 우리는 허구적 관념을 배격하고 실사구시의 가치관으로 나라의 앞날을 개척해야 한다는 개화기 선각자들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철학사연구회 엮음 철학사상사 p.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