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의 발자취와 우리의 과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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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무역협회 최고경영자과정 조찬 강연

일시: 2005년 7월 4일 (장소: 그랜드 인터콘티넨탈호텔)

한국철학연구소 강연

2006년 3월 25일 (장소: 성균관대학교  퇴계인문관)

두 원고를 다소 수정 가필했음


 

-以銅爲鑑 可正衣冠  以古爲鑑 可知興替- 唐 太宗

동으로 만든 거울을 보면 의관을 바르게 할 수 있고

역사의 거울을 보면 나라의 흥망을 알 수 있다.

 

20 세기의 우리나라 근대사를 돌이켜 보면 한말에는 개화운동이 있었고, 해방 이후, 특히 박정희 시대에는 근대화가 강조되었고 지금은 선진화가 시대적 과제로 화두에 오르고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개화나 근대화나 선진화는 결국 세계 정세 변화에 적응하여 우리 민족의 발전과 번영을 추구하는 개혁 운동이었다는 점에서는 근대사의 일관된 맥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화와 근대화의 발자취를 돌이켜 보고 지금 우리가 직면한 선진화의 주요 과제가 무엇인지를 살펴 보고자 한다.

먼저 이조 후기의 개화주의는 이 나라의 근대화의 첫 걸음이었다. 당시의 柳馨遠,, 李瀷, 朴趾源  金正喜 등의  실학파들은 민권 사상과 자유 평등 논을 펼치고 상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체제와 통상개국론을 제창 했다. 이러한 실학 사상은 마침내 한 걸음 더 나아가 서구적인 이념과 제도를 수용하자고 했던 개화주의의 밑 거름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개화주의자들 중에는 金允植, 申善 등과 같이 서구의 문물을 받아 들이되 삼강 오륜(三綱 五倫), 효제충신(孝悌忠信)과 같은 유교적 가치관을 보존해야 한다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주창하는 이도 있었고, 金玉均, 朴泳孝, 徐載弼 등과 같이 전통적 유학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 없고, 문벌을 폐지하고, 인재를 양성하며, 널리 학교를 설립하고 외국의 종교를 끌어들여 교화를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당시의 전제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개혁해야 한다는 급진파도 있었다.

이와 같이 개혁주의 자체 내에도 노선의 분열이 있었으나 그러나 양 진영의 목표에는 다름이 없었다. 한국의 철학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당시의 개화주의의 기본 목표는

“허구와 관념을 배척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가치관에 입각하여 개인의 삶과 국정을 개선”  하는 것이었다.[2]

주지하는 바와 같이 급진적 개혁파들은 개화당을 조직하고 마침내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켰으나 불행히도  “3일 천하”로 끝났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었고 서재필은 다시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이들의 개혁운동은 한말의 조정으로 하여금 세계정세에 눈뜨게 했고, 1894-96년의 갑오개혁 및 을미개혁의 動因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개혁은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압력에 의한 것이라는 평도 있으나 그러나 朴泳孝, 徐光範 등이 주역을 했고 현대사회로 이행하기 위한 필요한 개혁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李朝의 정치적 무력과 일본의 침략으로 개화주의는 빛을 보지 못했고 결국 우리 민족은 36년간 일제의 식민통치하에서 신음해야 했다.

그러나 해외로 망명한 지도자들은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안중근, 윤봉길, 이준 등의 구국 열사가 나타났고 김구 선생이 이끈 상해 임시정부와 미국으로 건너간 서재필 박사와 이승만 박사는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서재필 박사는 갑신정변에 가담 했다가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 후 그곳에서 의학 수업 (1889-1893)을 마치고 1895년 귀국하여 개화와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국내 개화 독립파와 함께 순 한글과 영문판으로 독립신문을 창간했고(1896), 독립협회를 결성하고 (1896) 독립문을 세우는데 (1897) 주도적 역할을 하는 한편 培材학당에서 청년들에게 주권재민의 민주 사상을 가르쳤고 協成會를 조직하여 인재 양성에 주력했다. 그러나 그가 발행한 독립신문(1896.4.7)이 수구파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 화근이 되어 다시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그는 미국에 있는 동안 의업(醫業)으로 얻는 수입으로 각종 독립운동을 계속 했고 해방 후에는 일시 귀국하여 매주 금요일 중앙방송국 (지금의 KBS)을 통해 자유 민주주의의 이념과 제도를 설명하고 우리 국민이 가야 할 길을 강론하기도 했다. 

이승만의 실사구시

이승만 박사는 서재필 박사의 영향하에서 개화주의를 이어받은 대표적 정치가였다.   그는 배재학당에서 서재필 박사가 젊은이들에게 자유민주주의를 가르치는 강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서재필 박사가 주도한 [獨立協會]에 가담하여 지도적 자리를 굳히고 독립협회를 통한 기금 모집으로 독립문을 세우고, [황성일보], [매일 신문]의 주필로 활약하면서 만민공동회를 조직했다. 1904년 고종의 밀서를 지니고 도미하여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났는데, 바로 이때에 미국 국방장관 타프트와 일본 수상 가쓰라 사이에는 밀약, 즉 일본이 비율빈을 침공하지 않으면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묵인한다는 밀약이 체결되고 있었다.  그 이듬해 1905년 11월 17일 불법적인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실의에 빠진 이승만은 미국에 체류하여 勉學의 길을 걷게 된다.

그 후 이승만 박사는 하와이에 거주하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하고,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총리와 대통령을 역임한 바도 있다. 해방 후 귀국한 이 박사는 소련의 한반도 공산화 전략과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실을 직시하여 남한만의 단독 정부수립을 주장하여 남한을 자유민주의 나라로 이끌었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실사구시의 노선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좌파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을 폄하하는 소리가 높다. 즉 그들은 김일성은 북한에서 해방직후 친일파를 숙청하여 민족 정체성을 바로 세웠는데 남한의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파를 관용하고 중용하여 민족정기를 말살했고 그 결과 대한민국은 민족적 정통성이 없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고 주장한다.

민족을 중요시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민족정기”니 “민족 정체성” 이니 하는 것은 하나의 관념인데 관념 만으로 현실적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거기에는 관념과 현실을 동시에 통찰하는 실사구시의 경륜과 정책이 필요하다.

소련 공산주의 세력의 남하를 저지하는 것이 최대의 민족적 과제라고 믿었던 이승만은 친일 인사들을 숙청하는 것보다 포섭하는 것이 그의 반공 정책에 유리하다고 판단했고, 신생 정부를 운영하자니 일제 통치 하에서 행정경험을 쌓은 사람 외에는 시민사회를 위한 행정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신생국가의 국군을 창설해야 했는데 군사교육을 받은 사람이란 소수의 광복군 장성 (이청천 장군과 같은) 외에는 일본군 및 일본의 만주(滿洲)군 출신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본군 출신이 국군 창립의 주역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관념론과 실사구시의 어느 편이 발전적이었는지는 결과를 놓고 판단 할 수 밖에 없다. 민족 정기와 정체성을 세웠다는 김일성은 동족 상잔의 6.25 동란을 일으켰고, 김일성 부자는 북한 사회를 지금과 같은 비참한 상태로 만들었다. 반면에 실사구시 노선을 택한 남한은 파란 곡절을 겪으면서도 지금의 대한민국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일본군 출신의 장병들이 6.25 동란 때에 공산화를 저지하는 데에 크게 공헌한 것도 사실이다.

박정희의 실사구시

해방 후 무엇보다도 긴급한 과제는 경제개발을 통해 조상 전래의 가난으로부터 탈출하는 일이었는데 여기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실사구시의 지도력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는 경제적 기초가 없는 민주주의는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경제 개발을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믿고 있었고 그래서 민주주의의 경제적 기초를 만드는 것이 그의 역사적 사명이라고 믿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마디로 말해서 북쪽의 무력적화통일 전략을 거부하는 안보태세를 확립하는 동시에 이 나라 국민을 전통적 빈곤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데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참고로 1960년 10월에 발간된 미국의 권위지인 Foreign Affairs는 당시의 한국경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실업자는 노동인구의 25%, 1960년의 국민 1인당 GNP는 100불 이하이고, 전력 산출량은 멕시코의 6분의 1, 수출은 200만 달러, 수입은 2억 달러, 이래서 한국의 경제적 기적의 가능성은 전혀 없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원조계획의 가장 실망적인 국면은, 원조 계획이 생활수준 향상을 지속할 만한 성장을 가져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경제성장의 조건은 북한이 남한보다 순조로운 상태에 있다…결국 한국인들이 직면한 선택은 워싱턴이냐. 모스크바냐가 아니라 서울이냐, 평양이냐 하는 것이다."

당시의 이 각박한 현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현실은 경제적 빈곤과 침체 속에서 북쪽의 적화통일전략의 함정에 빠질 수 있는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정치력과 지도력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고 그것이 5.16 군사 쿠데타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사건은 정치적으로 불행한 일이었으나 어쨌든 그 후 불과 18년 만에 세계의 최빈국 중의 하나였던 한국이 각광 받는 산업국가로 탈바꿈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필자는 이상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을 실사구시의 정치가라고 평 했는데 그들의 부정적 행적을 고려 할 때 무엇이 실사구시의 기준이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한 대답은 개화주의가 말해 주고 있다. 즉 개인의 삶과 국정을 개선하는 것이 개화의 목표인데 이승만, 박정희 두 대통령은 개화주의가 그토록 염원했던 개인의 자유와 물질적 후생을 가져 오는 데에 결정적 지도력을 발휘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국민의 자유와 빵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실사구시라 할 수 없다.

지도자들의 고난과 비운

지금  이승만, 박정희, 양 대통령에 대하여 정치적으로 폄하하는 소리가 높은데 비단 그들 뿐만 아니라 근대화를 이끈 지도자들은 모두가 정치적 응징의 대상이 되었다. 金玉均, 洪英植 朴泳敎 등의 개혁주의자들은 개혁을 시도하다가 살해되었고, 朴泳孝, 徐光範, 徐載弼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으나 서재필의 경우는 그가 역적으로 몰리게 되자 그의 부모, 아내, 형은 음독 자살했고 동생은 참형 됐으며 두 살 난 아들은 돌보는 이가 없어 굶어 죽었다 한다. 이승만 또한 독립협회를 이끌고 개화운동을 하다가 왕조의 탄압으로 5년간의 옥 살이를 한 후에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 것이다.[3]

하기야 선진화를 추진한 지도자들의 허물 또한 없지 않았다. 김옥균 등의 급진주의자들은 이 나라 국권 침탈을 꾀하는 일본의 야욕을 예견하지 못했고, 일본의 영향 하에 개혁을 추진했던 박영효는 파란 만장의 고난 끝에 저도 모르게 친일파가 되었다.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의 나라로 이끈 이승만 대통령은 4.19 혁명의 비극을 피하지 못했고. 물질적 풍요의 터전을 마련한 박정희 대통령은 흉탄에 쓰러지고 군사독재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지도자의 공과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러면 어찌하여 이 나라의 근대화를 이끈 지도자들이 예외 없이 불행한 종말을 보게 되었을까?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그 중에는 이조 시대의 4색 당쟁의 정치문화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조 500년 동안 정적을 숙청하고 죽이는 사화(士禍)가 12회나 있었는데 그것은 국민 생활의 실리와 향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고 세도와 권세를 위한 관념상의 싸움이었다. 예컨대 조선 후기의 보수적 정치가들은 서양은 아비도 없고 군왕도 없는(無父無君) 오랑캐 나라이니 사악함을 물리치고 바른 것을 지켜야 한다는 척사위정 (斥邪衛正)의 관념론을 주장했다. 그래서 개화파들은 관념을 배격하고 실사구시의 가치관을 따르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적 정치문화는 지금까지도 우리사회에 암영을 던지고 있다. 민족, 자주, 평등의 이름으로 관념주의와 “실사구시”가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공유한 과거의 지도자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본인은 이 문제 역시 실사구시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나라의 역사에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있고 그 역사에서 주역을 담당한 지도자 또한 양면이 있게 마련이다. 

지도자를 이념적 지도자와 통치적 지도자로 구별할 수 있다 영국의 민주혁명의 이념적 지도자는 존 록과  J. S. 밀 등이 널리 알려져 있고 통치적 지도자로서는 크롬웰 (Oliver Cromwell) 을 들 수 있다 미국의 혁명에는 영국의 존 록의 영향을 받은 매디슨과 해밀턴 등이 이념의 지도자였고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통치적 지도자는 워싱턴과 링컨이 유명하다.  우리나라의 이념적 지도자는 백범 김구 선생, 도산 안창호 선생 등이 널리 알려져 있고 통치적 지도자로서는 물론 이승만, 박정희 두 대통령을 손 꼽아야 한다. 이념적 지도자는 현실을 비판하고 이상을 드높이지만 통치적 지도자는 이념을 현실에 적용하려 할 때에 엄청난 난관에 부딪치고 때로는 그 이념에 반하는 행동이 강요되는 경우도 있다.

영국의 크롬웰이 그 좋은 예이다.  영국 청교도혁명의 지도자인 크롬웰은 국왕의 전제주의와 왕당파와의 치열한 전쟁에서 영국의 의회주의를 승리로 이끈 영웅이다.  그는 국왕 촬스 1세를 처형하고, 왕정을 해체하고, 귀족원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언한 청교도 혁명의 중심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1653년 호민관으로 취임한 후에는 왕당파, 장로교파 그리고 급진파인 레벨러(수평파라고 하기도 함) 등 반대세력을 가차 없이 탄압하였고 전국을 11개 軍區로 나누어 군인통치를 실시했다. 의회주의와는 정반대의 행동이다. 그는 1658년에 병사했는데 촬스 2세가 왕정을 복구하자 그의 부왕을 처형한 보복으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매장된 그의 시신을 파내 효수(梟首)형에 처했다. 그러나 영국사람들은 크롬웰을 폄하하지 않는다.  Encyclopedia Britannica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그는 영국을 위대한 나라로 만들었고 그의 치적에는 질서의 확립, 경제의 재건, 종교적 관용의 실현, 교육기회의 확대, 사회 정의의 실현 등이 포함된다"

우리 나라에서는 글과 말로 좋은 소리를 하는 지도자에게는 존경을 표하지만 나라의 각박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흙탕물에 뛰어든 통치의 지도자는 옷에 흙을 묻혔다 하여 지나치게 깎아 내리는 경향이 있다.  이념의 지도자를 존경해야 하지만 동시에 실천의 지도자도 이해하고 존경해야 한다. 톨스토이는 "이해하는 것은 용서하는 것” 이라 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선인들의 부정적 측면을 합리화할 필요는 없지만 동시에 긍정적 측면을 평가하고 그들이 국가를 위해 이룩한 업적을 이어 받아 그 위에 쌓아 올리는 노력을 해야 나라가 발전할 수 있다. 일부 정치 세력이 허구적 관념으로 과거를 부정하고 맹목적으로 과거의 지도자들을 폄하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러한 편협한 역사관에 현혹 되지 말아야 한다.

역사 인식 

이점에 관련하여 정치권의 역사 인식에 대하여 일언 하고자 한다. 정치권은 “진실 규명과 화해”를 위해 [과거사 정리위원회]를 설치 했다. 그러나 역사를 정치화하는 것이 과연 과거 청산의 수단이 될 수 있을까?

역사에는 줄기와 지엽 (가지와 잎)이 있다.  역사의 큰 줄기가 되는 사실은 비교적 정확 하게 알 수 있지만 그 해석에는 논자에 따라 관점이 다를 수 있다. 예컨대 6·25 동란의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지만 그 역사적 의미에 관하여는 좌익과 우익의 상반된 견해가 있다. 하물며 지엽적인 사항에 관하여는 사실 자체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역사는 승자의 역사” 라는 말은 역사의 기록이 사실과 다를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박흥식은 대표적 친일파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지만 그가 보석금을 내어 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을 석방케 했다는 일면이 있다는 것은 흥사단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최남선이 친일학자로 지목되지만 그는 만주 건국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비록 나는 친일을 하고 있지만 너희들이 배워야 민족의 독립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가르치고 있노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고 그의 제자들이 전하고 있다. 김성수, 김활란, 박정희 등을 친일파로 규정하지만 이에 대한 거센 반론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상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인간을 연구하는 것과 같은데 인간의 정체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여담이지만 외국에도 그러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비근한 예로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오스왈드의 총탄으로 암살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인데 그 암살의 배후가 밝혀지지 않았다는 주장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Kenneth C. Davis는  “Don’t know much about the bible” 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의 책에는 성서와 다른 너무나 충격적인 “사실” 들이 담겨져 있다. 예컨대 요한 복음 제 8장을 보면 Mary Magdaline (Mary of Magdala)가 간음을 했다 하여 사람 들이 그를 때려 죽이려 하자  예수께서  “너희 중에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라고  말씀하시자 군중들이 손을 놓아 그녀를 구출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다른 기록에 따르면 Mary는 창녀가 아니라 가장 성스러운 여자였다는 것이다. Mary는 예수가 승천 하신 후 그의 시체를 거두기 위해 달려 간 여인들 중의 한 사람이었고 예수께서 부활 하셨을 때 제일 먼저 Mary앞에 나타나셨다는 성서의 기록이 그를 뒷 바침 한다는 것이다.  요즘 Dan Brown 의 The Da Vinch Code가 미국에서 베스트 셀러가 되었는데 이 소설의 줄거리는 Mary가 창녀가 아니고 실은 예수의 아내였다는 것이고 그는 소설이지만 역사적 기록에 근거했다는 말을 하고 있다. 물론 이 주장을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사에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기가 많다는 사실을 상기케 한다. 

그러면 이러한 과거사에 관한 불확실성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필자는 여기에서 세 가지 示唆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위에서 본 역사 기록의 불확실성에 비추어 과거사를 정치화한다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오늘의 정치적 심판이 내일의 정치적 심판과 다를 수 있고 달라지면 정쟁과 사회적 갈등의 불씨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조사, 연구와 판단은 어디까지나 역사가의 몫이 되어야 한다. 다만 정부는 학문적 차원에서 역사가들의 조사와 연구를 재정면에서, 또는 정부 자료의 공개를 통하여 지원할 수 있을 것이다. [4]

둘째는 역사의 줄거리와 枝葉을 구별하는 것이다. 영국의 경제학자 A. Marshall은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고 말했는데 영국 사람들이 크롬 웰을 보는 눈이 바로 그러한 것이 아닌가 한다. 같은 맥락으로 이승만에 관한 역사의 숲은 공산화를 저지하기 위해 남한 단독정부를 세우고 남한을 자유민주의 나라로 이끌었다는 것이고, 박정희에 관한 역사의 숲은 18년 만에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던 한국을 세계의 주요 산업 국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셋째로 부정적 측면에서 교훈을 얻되 선인들의 긍정적 업적 위에 쌓아 올리는 노력이 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부정적 측면만을 강조하고 과거의 업적을 폄하 하거나 부정하면 그 나라는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가 없고 퇴보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선진화의 역사적 맥락 (脈絡)

이제 우리는 개화운동, 근대화 운동에 이어 21세기를 살아갈 수 있는 선진화의 길을 찾아야 할 때가 왔다. 돌이켜보면 100年 전 개화기의 문제의식과 오늘의 문제의식이 주제(主題)에 관한 한 크게 다르지 않다. 예컨대 한국은 지금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의 4강의 틈바구니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이것은 한말의 개화파의 고민과 같은 것이다.

개화파들은 두 가지 진로를 제시했다. 하나는 자강(自强) 혹은 실력양성이고 다른 하나는 식산흥업(殖産興業)이었다.  전자는 교육을 개혁하여 국민 대중으로 하여금 근대적인 국민 의식을 지니도록 계몽하자는 것이고, 후자는 산업을 육성하여 경제력을 키우자는 것이었다. 오늘의 우리의 문제의식도 이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개회기의 문제의식과 오늘의 문제의식의 주제는 같다 하더라도 지금의 선진화의 내용과 방법은 옛날과 다를 수 밖에 없다.

오늘의 과제 

누구나 잘 아는 바와 같이 20세기 후반기 이후의 세계사의 조류는  (1)시장경제의 확대,  (2)정보혁명,  (3)민주화,  (4)세계화, (5)자연환경에 대한 각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이러한 조류를 타고 경제 발전과 정치적 민주화에 성공한 예에 속하나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문턱에서 그를 가로막는 내외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먼저 정치면에서는 후진적 정치문화로 대의정치의 운영이 난항을 겪고 있고 국회가 민주사회의 다원화를 통합하는 본래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둘째로 사회면에서는 이념의 갈등, 집단적 이기주의, 계층간 지역간 격차와 대립, 노사 분규, 법치주의 이완, 국민교육 정책의 방황 등이 국가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셋째로 경제면에 있어서는 중국 경제의 도약으로 우리의 전통적 산업이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는데 이에 대처하기 위해 기업들이 자신의 기술을 개발하고 신제품의 시장을 개척하는 일이 쉽지가 않다. 수출이 성장의 버팀목이 되고 있지만 소수 품목에 집중되어 있고 소재와 부품의 수입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고용 흡수력이 미약하여 청년 실업이 늘고 있다. 농업개방이 불가피한데 농업의 기업화, 과학화 요구에 적응하지 못하는 농민들은 실의에 빠져 있다.

민주사회의 의사결정 

이러한 문제점들을 모르는 지식인은 없다. 그러나 문제 해결 방법은 결코 간단치 않다. 민주화된 사회에 있어서는 모든 문제에 있어서 이해관계와 견해가 대립하기 때문에 당사자들, 혹은 사회적 합의를 거치지 않고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다. 그러나 대화와 토론을 통하여 합리적 결론에 도달 하자면 당사자들이 논리에 승복하고 결론이 나면 그 것에 따르는 시민 의식이 필요한데 우리의 실정은 그렇지가 못하다. 논리를 무시하고 당파적 주장에 몰두하거나 반대자의 견해를 논리적으로 비판하기 보다는 감정적으로 모함하고, 논리에 승복하기보다는 군중 심리에 편승하는 풍조가 있다. 선진국에서는 논리에 승복하지 않거나 안에서는 승복하고 밖에서는 딴 소리를 하는 지도자가 있으면 사회적으로 매장되는데 우리 사회에서는 그러한 사회적 응징의 풍토가 조성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화와 토론문화부터 선진화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다음에 위에서 합리적 결론이라 하였는데 합리와 불합리를 가리는 가치관의 준거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가 있다 우리의 궁극의 기준은 자유민주와 시장경제의 원리이다. 자유를 제도화한 것이 민주적 대의정치와 시장경제 체제인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국가이념이자 지구촌의 보편적 가치이다. 시장경제 운용에는 네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는 자율과 경쟁의 원칙, 둘째는 공정경쟁의 원칙, 셋째는 균형과 형평의 원칙, 넷째는 시장 보완의 원칙이다.  모든 사회 문제가 복잡할수록 이러한 원칙에 입각하여 해답을 구하도록 노력하면 우리 경제는 성장, 발전을 계속하고 국민들의 생활수준을 향상 시킬 수 있다. 

지금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소리가 높다. 우리가 사회 각 분야에서 지금의 후진성을 탈피하지 않으면 과연 세계화, 정보화, 동북아 시대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걱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 가지  난점에 불구하고 고유의 문화와 유능한 인적자원을 자랑하고 있고, 수많은 도전을 슬기롭게 극복해 온 민족적 저력과 경험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바탕으로 민간의 창의와 의욕을 자유롭게 발휘케 하는 제도와 환경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모든 문제 해결의 첩경이라고 나는 믿는다.  물론 여기에는 민간과 정부의 상호이해와 협력이 필수적이다. 민간이 모든 문제를 정부의 탓으로 돌려서도 아니 되고, 정부가 민간의 창의와 에너지를 억압해서도 아니 된다. 우리는 위에서 말한 원칙을 받들어 같은 방향으로 힘을 합쳐야 하다.  끝.

 


[1] 본고는 다른 강연에서 사용한 원고를 수정 가필한 것임 

[2] 한국철학사연구회 엮음, 한국철학사상사, (심산 문화, 서울 2003년 8월 25일 초판), p.401

[3] 1898년 만민공동회가 황위 폐지, 정부 타도를 꾀한다는 황국협회의 모함으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음. 1899년 탈옥했다가 다시 잡혀 종신 징역으로 복역. 옥중에서 영어공부를 함. 1904년 [독립정신]을 집필, 동년 8얼 사면령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석방됨   

[4] 필자는 이하의 견해를 동아일보 2004년 9월 18일 과거 청산 역사가의 몫이다. 에서 피력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