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통합과 국가 이념

2005.3.31(목) 극동포럼 조찬 강연

 

정신적 구심점이 있어야 .

지금 이 나라는 갈래 갈래로 찢겨져 있다. 우익과 좌익, 보수와 진보, 친미 와 반미, 민족주의와 세계주의, 노동자 대 사용자, 부자 대 빈자 등의 대립과 갈등이 계속되고 있는데 이것을 단순히 민주사회의 다원화 현상으로 치부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다원화를 수렴하는 공동의 가치와 이념이 없으면 끝없는 갈등과 항쟁으로 국민의 에너지를 낭비하고 국가의 안정과 발전과 어렵게 한다.

정치 지도자들도 이점을 우려하여 저마다 국민통합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무엇을 향한 통합이냐 하는 것을 분명히 밝히지 않고 있다. 국민 들에게 정신적 구심점이 없으면 국민 통합은 불가능한데 말이다.

그러면 국민들의 정신적 구심점을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나라 마다 건국이념 혹은 국가이념이 있고, 바로 그것이 국민들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는 것이다. 국가이념은 수레 바퀴의 중심축(pivot)에 비유 할 수 있다. 바퀴에는 여러 개의 살 (spoke) 이 있는데 그것 들이 중심 축으로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바퀴가 구를 수 있고 수레를 움직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다원적인 대립과 갈등이 국가이념으로 수렴되어야 그 나라는 건강하고 힘있는 나라가 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의 국가이념은 자유 민주주의인데 자유는 사상 혹은 관념이고 그를 제도화한 것이 민주적 대의정치와 시장경제 체제이다. 시간이 없으므로 시장경제의 운용원리에 대해서만 간략히 언급하고 넘어가가자 한다. 시장경제는 자유와 경쟁을 근간으로 하는 경제 체제이다. 그런데 경쟁이 있으면 반드시 승자와 패자, 강자와 약자, 부자와 빈자가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2분화를 어떻게 관리하느냐 하는 것이 국가운영의 기본과제가 된다.  승자가 패자를 멸시하고,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고, 부자가 빈자를 돌보지 않으면 자유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경쟁과 자유를 적절히 조절해야 시장경제는 발전과 향상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여기에서 정부 경제운용의 네 가지 원칙이 도출된다 첫째는 자율과 경쟁의 원칙, 둘째는 공정경쟁의 원칙, 셋째는 균형과 형평의 원칙, 넷째는 시장 보완의 원칙이다. 20세기의 위대한 역사적 변화는 정치적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지구촌의 보편적 가치로 정착되었다는 것이라고 사가(史家)들은 말하는데 우리의 국가이념과 체제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주류를 타고 있는 것이다.

통일과 국가이념

우리 나라에서는 국가이념과 체제를 중시하지 않을 수 없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남북이 분단상태에 있고 남북에 정치 체제와 이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념 갈등 혹은 “남남 갈등”은 숙명적인 것이다. 이념과 체제문제를 거론하면 색깔론 이라고 펄쩍 뛰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좌파 이념을 감추거나 혹은 이념의 무정견을 호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차라리 색깔을 들어내고 논리적 극한까지 토론을 통해 이념갈등을 정리하는 것이 보다 건설적이다.

언제인가는 민족 통일의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 남한의 국가이념 즉 자유민주와 시장경제를 북 쪽으로 연장하는 외에 무슨 대안이 있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다. 남북간의 긴장완화와 평화유지를 위해 남북이 정치체제를 서로 인정하는 남북 연방제를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도 단계일 뿐 궁극의 목표는 자유민주의 통일국가 일 수 박에 없지 않은가? 

어떤 논자들은 이념과 체제를 초월한 민족적 통합이 최고의 가치이고 이념과 체제문제는 통일 후에 해결할 수 있는 민족 내부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념과 체제를 무시한 통일은 남.북 예멘의 경험이 말해 주듯이 내부 혼란과 내란을 불러오고 평화적 통일이 되지 않는다.[1] 결국 평화적 통일이란 북한이 공산주의 독재체제를 버릴 때에만 가능하다. 이 단순 명백한 사리를 무시하는 데에서 남북 문제에 관한 이념적 혼란이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이에 대하여 어떤 논자는 이념과 체제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시대와 나라에 따라 내용을 달리 할 수 있는 것이니 남한의 이념과 체제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북한의 그것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 지지 않는 보편적 가치가 있다. 예컨대 인권의 존중, 선거와 투표의 자유, 집회의 자유, 종교의 자유와 같은 개인의 기본권은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북한의 독재체제는 이 보편적 가치를 실질적으로 배제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또 어떤 논자는 냉전 종식과 함께 이념 논쟁은 살아졌고 21세기에는 구체적 정책을 논하면 된다는 사람도 있다. 이사람 또한 남.북 한의 이념과 체제가 대치 상태에 있다는 현실을 무시하고 있고, 이념적 기초 없이 정책 방향을 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21세기에는 이념이 주요치 않다는 말도 수궁하기 어렵다. 민주주의와 독재주의 사이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고 넓게는 [문명의 충돌]을 예고하는 학자도 있지 않은가?

국가이념과 남북문제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지도자와 국민이 이러한 국가이념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어떤 정치지도자는 우리의 국가이념이 자유민주인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터인데 새삼 그것을 강조하는 것은 소모적이라는 말을 한 일이 있다. 그러나 이 지도자는 대북정책, 북핵 문제, 반미 운동, 전교조, 한총련, 노사문제, 언론 정책, 등을 둘러싸고 이념 갈등이 심각한 현실을 일부러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대통령은 헌법에 명시한 국가이념의 원리와 원칙을 천명하고 그에 따라 엉클어진 문제의 논점을 정리하고 국론을 통합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정치지도자가 국가이념을 강조하는 것은 결코 소모적인 일이 아니다.

다음에 북한을 자극할까 두려워서 국가이념을 강조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즉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우면, 북을 흡수 통일하겠다는 말이 되어 북한이 반발하고 남북 관계를 원만히 풀어 갈 수 없다는 것이다. 남북 협상과정에서 북한의 입장을 배려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국민에게 국가이념의 원리 원칙을 천명하여 내부적 이념 갈등을 극복하는 일을 포기해야 할 만큼 그것이 중요하냐 하는 것이다. 어차피 북한정권은 우리 헌법을 모르는바 아니고, 남한의 대다수 국민들의 의사를 모르는 것도 아니며, 이라크 파병, 한미공조 강조 등에서 드러난 우리 정부의 내심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우리의 입장을 명백히 하고 할 말을 하면서 협상에 임하는 것이 결국에는 보다 낳은 결과를 가져 올 것이다.

국가이념에 투철하지 못한 데에서 대북정책에 혼선이 생기고 있다. 이른바 ‘386’의 일부는 지난날 남한의 민주화와 인권 보호를 위해 과감히 투쟁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북한의 민주화와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왜 그럴까? 그들은 북한의 정권과 동포를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북한 정권을 규탄하는 것은 곧 북한 동포를 능멸하는 것이고 북한 동포를 사랑하는 것은 곧 북한 정권을 포옹(抱擁)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정권과 동포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동포는 영원하지만 정권은 영원할 수 없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주기적 선거를 통해 정권이 교체되는데, 북한에는 세습 독재체제가 유지되고 있고 지금도 정권 세습을 위한 암투가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북한 동포를 위한 경제원조를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북한 정권과의 화해협력이 반드시 동포와의 화해 협력을 의미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여러 가지 예를 들 수 있으나, 먼저 UN과 미국이 제기한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정부와 여당이 소극적 혹은 부정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북한 정권에게는 화해 협력이 될 지 모르나 자유를 갈망하는 북한 동포에 대하여는 그들의 비원을 배반하는 마이너스 협력이다. 북한의 민주화 세력은 후 일에 남한 지도자들의 무원칙을 신랄하게 비판할 것이다

하기야 자유 민주 사회에도 문제는 많다. 만성적 실업, 빈부격차, 환경 파괴 등이 자본주의의 주요 약점으로 지적되어 왔고 민주주의와 사장경제의 운용 방식에 관하여도 대립과 갈등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점에 불구하고 왜 자유민주체제가 우리의 최선의 선택이냐 하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정치 지도자나 일반 국민은 많지가 않다. 그 것은 우리나라의 국민교육이 국가이념과 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일 통일의 때가 왔을 때 철저한 공산주의 의식화 교육으로 머리가 굳어진 이북 동포들을 자유 민주 체제에 적응할 수 있도록 지도 하자면 남쪽 사람들의 국가 이념에 관한 투철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남한이 북한 동포를 이념적으로 설득하지 못하면 통일에 따르는 각종 혼란을 극복하기 어렵게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내란을 자초할 수도 있는 것이다.

개화사상과 국가이념[2]

지금의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와 달리 빵과 자유의 굶주림을 모르고 자라 온 세대이다. 그들은 자유민주의 고마움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고 그를 실현 하기 위한 대가가 무엇이었는지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심지어 자유민주주의는 미국의 이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젊은이 들도 있는 것 같다.

한국의 철학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자유 민주 사상은 해방 후가 아니라 일찍이 조선 후기의 실학자 에서 비롯 된 것이라 한다. 柳馨遠,, 李瀷, 朴趾源  金正喜 등의  실학파는 민권 사상과 자유 평등론을 펼치고 상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체제와 통상개국론을 제창하였다. 이러한 실학 사상은 한 거름 더 나아가 서구적인 이념과 제도를 수용하자고 했던 개화주의로 연결되었다. 돌이켜 보면 한말의 개화사상은 이 나라의 근대화의 첫 거름이었고 그 행보는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당시 조선 후기의 보수적 정치사상은 성리학의 전통을 중시하여 중국의 명 나라가 멸망하자 조선 만이 유일한 문화 국인 小中華이고 서양은 아비도 없고 군왕도 없는(無父無君) 오랑케 나라이니 사악함을 물리치고 바른 것을 지켜야 한다는 척사위정 (斥邪衛正)의 사상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환경 하에서 개화를 추진한다는 것은 보통의 일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개화주의 진영 자체 내에도 노선의 충돌과 마찰이 없지 않았다. 金允植, 申簊善 등은 서구의 문물을 받아드리되 삼강 오륜(三綱 五倫), 효제충신(孝悌忠信)과 같은 유교적 가치관을 보존해야 한다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주창한 반면, 金玉均, 朴泳孝, 徐載弼  등은 전통적 유학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 없고, 문벌을 폐지하고, 인재를 선발하며, 널리 학교를 설립하고 외국의 종교를 끌어들여 교화를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당시의 전제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개혁하고자 했다. 급진적 개혁을 추구하는 이들은 개화당을 조직하고 마침내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켰으나 개혁에 실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여러 갈래의 개화사상에는 하나의 뚜렷한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허구와 관념을 배척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가치관에 입각하여 개인의 삶과 국정을 개선”[3]  하자는 것이었다.

8.15 해방 이후 남한에서 개화사상의 전통을 이어받은 대표적 정치가는 이승만 박사였다. 그는 이 나라의 역사적 정통에서 벗어난 북한 공산주의와 싸우다가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실을 직시하여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하고 남한을 자유민주의 나라로 이끌었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실사구시의 노선이었다. 그런데 지금 좌파에서는 이승만 박사를 폄하하는 소리가 높다. 즉 좌파들은 김일성은 북한에서 해방직후 친일파를 숙청하여 민족 정기를 바로 세웠는데 남한의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파를 관용하고 중용하여 민족정기를 말살했고 그 결과 대한민국은 민족적 정통성이 없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고 주장한다. 민족 정기란 물론 하나의 관념이다.

그러나 실사구시의 실용주의 관점은 이와 다르다.[4] 소련 공산주의 세력의 남하를 저지하는 것이 최대의 민족적 과제라고 믿었든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 인사들을 숙청하는 것 보다 포섭하는 것이 그의 반공 정책에 유리하다고 판단 했고, 신생 정부를 운영하자니 일제 통치하에서 행정경험을 싼 사람 외에는 행정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구하기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신생국가의 국군을 창설해야 했는데 군사교육을 받은 사람이란 소수의 광복군 장성 (이 청천 장군과 같은 )과 일본의 만주(滿洲)군 출신 군인 밖에 없었다. 그래서 만군 출신이 국군 창립의 주역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관념론과 실사구시의 어느 편이 발전적이었는지는 결과를 놓고 판단 할 수 밖에 없다. 민족 정기를 세웠다는 김일성은 동족상잔의 6.25 동란을 일으켰고, 김일성 부자는 북한 사회를 지금과 같은 비참한 상태로 만들었다. 반면에 실사구시의 실용주의로 이끌었던 남한은 파란 곡절을 겪으면서도 지금의 대한민국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일본군 출신의 장병들이 6.25 동란 때에 나라를 지키는 데에 크게 공헌한 것도 사실이다.

이 나라 근대화의 봉화를 든 개혁주의자들이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고 피를 흘렸는지는 國史를 읽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金玉均, 洪英植 朴泳敎 등의 정치 지도자들은 민권 신장을 위한 개혁을 시도하다가 살해되었고, 朴泳孝, 徐光範, 徐載弼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는데 그 후 박영효는 친일 김홍집 내각에 참여하여 乙未개혁을 주도했고, 미국으로 건너갔던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설립하여 개화당의 맥을 이어갔다. 서재필 박사 또한 역적으로 몰리게 되자 그의 부모, 아내, 형은 음독 자살했고 동생은 참형 됐으며 두 살 난 아들은 돌보는 이가 없어 굶어 죽었다 한다. 이러한 처참한 박해에 불구하고 서재필 박사는 독립신문 (1896년 4월 7일에 창간)과 영자신문 《The Independence》를 함께 발간했고, 이상재(李商在), 이승만(李承晩) 등과 독립협회(獨立協會)를 결성하고 독립문을 세웠지 않았는가?  서재필 박사는 배재학당에서 젊은이들에게 자유민주주의를 가르쳤는데 이 때 李承晩 박사도 그의 강의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한다. 해방 후 고국에 돌아온 서재필 박사는 매주 금요일 중앙방송국 (지금의 KBS)을 통해 주로 자유민주주의의 이념과 제도를 설명하고 우리 국민이 가야 할 길을 강의하기도 했다[5].

개화기의 민주 사상은 3.1독립선언문에 반영되었고 그를 통해, 상해 임시정부로 계승되어, 임시정부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임] 이라고 선언하게 된 것이다. 이 법통을 어어 받은 대한민국 헌법 제 1조 또한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라고 선언하였고, 헌법 제 4조는 “통일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이어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우리는 6.25 동란을 통해 공산주의 체제하의 북한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으나 국토의 반쪽이나마 자유민주체제의 나라를 세우게 되었는데 그를 지키기 위한  6.25 동란에서  30여 만 명의 국군 장병과 3만 5천명 이상의 UN 군의 희생이 있었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의 국제정치를 보는 식견과 실사구시적 지도력이 없었다면 남한은 아마도 공산화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개화사상의 법통을 이어 받은 대한민국은 마침내 개혁주의가 염원했던 개인의 자유와 물질적 풍요를 실현하였고,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해 가고 있는 것이다.

하기야 근대화를 이끈 지도자들에게 허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김옥균 같은 급진주의자들은 이 나라 국권 침탈을 꾀하는 일본의 야욕을 예견하지 못했고, 일본의 영향하에 개혁을 추진했던 박영효는 파란 만장의 고난을   겪다가 결국에는 친일파로 전락했으며,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의 나라로 이끈 이승만 대통령은 4.19 혁명의 비극을 피치 못했고, 물질적 풍요의 터전을 닦은 박정희 대통령은 군사독재라는 비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실사구시의 실용주의가 이 나라의 근대화를 추진하여 국운의 수뢰 바퀴를 앞으로 돌린 것 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느 나라 역사에도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있고 또 그 시대를 담당한 지도자에게도 명암이 있게 마련이다. 지도자의 부정적 측면만보고 긍정적 측면을 외면하는 것은 그 자체가 단순한 관념주의라 할 것이다. 

개화기 이후 120여년이 진난 오늘에 있어서도 그 당시의 문제 의식과 오늘의 문제 의식은 거의 같다. 일례로 안보 외교 면에 있어서 당시 영국의 거문도 점령, 원세개 (袁世凱)의 내정간섭, 1895년의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 1905년 일본과의 을사륵약 (乙巳勒約) 등으로 나라가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했으나 국론이 분분한  무렵(1880) 청나라 주일 공사 참찬관 황준헌 (黃遵憲)은 [조선 책략]을 써서 김홍집(金弘集)에게 전달했고 김홍집은 그것을 고종에게 올렸다. 황준헌은 그 책에서 조선의 외교 정책의 방향을 제시했는데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면 종주국인 중국과 친밀히 하고 (親 中國), 중국 외의 유일한 수교국인 일본과 결합하고 (結 日本), 침략과 영토의 야심이 없는 미국과 연합(聯 美國)하고 서양 각국과 수호통상(修好通商) 하여 부국강병을 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러한 개화정책을 홍보하기 위하여 [조선책략]을 전국의 유생들에게 배포하였으나 개화를 규탄하는 소리가 높고 이만손(李(萬孫))등은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를 조정에 올려 개화정책을 맹렬히 비판하는가 하면 곽기락 (郭基洛)은 개화정책을 지지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결국 척사위정파와 개혁파가 일본, 청국, 러시아의 각축과 내정 간섭에 얽혀 서로 싸우다가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고 만 것이다. 

지금 우리 나라와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과의 안보 외교 관계는 한말의 상태를 방불케 한다. 일본의 독도 망언과 역사교과서의 왜곡으로 한일관계가 다시 악화하고 있고, 중국은 고구려사 문제를 제기하여 한국을 압박하고 있는가 하면 북한의 핵 무장을 방지하기 위한 6자 회담도 아무런 진전이 없다.  동북아에서 균형화 (Balancing Power) 역할을 해온 미국은 최근 일본과의 동맹관계를 한층 공고히 하여 중국을 견제하려고 하고 있고, 한미간의 동맹관계와 전통적 우호관계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로 변하였다. 한국은 지금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의 4강의 틈바구니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이것은 한말의 고민과 같은 것이다.

당시의 개화파들은 두 가지 진로를 제시했다. 하나는 실력양성이고 다른 하나는 식산흥업(殖産興業)이었다. 전자는 교육을 개혁하여 국민 대중으로 하여금 근대적인 국민 의식을 지니도록 계몽하는 것이고, 후자는 산업을 육성하여 경제력을 키우자는 것이었다. 오늘의 우리의 문제의식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지금 국민교육이 문제시 되고 있는데, 국민들이 21세기의 세계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구촌의 보편적 가치와 합치하는 국가이념과 도의 정신을 함양(涵養)하고 경제적 국제경쟁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자질을 양성하는 교육이 요구되고 있다. 한국이 그나마도 세계에서 오늘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경제발전의 덕택이고 경제 발전이 가능했던 것은 우방(友邦)의 시장개방과 경제협력이 있었기 때문 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경제적 실리를 저 바리지 말아야 한다.

특히 우리는 허구와 관념을 배격하고 실사구시의 가치관으로 나라의 앞날을 개척해야 한다는 개화사상을 거울 삼아야 한다. 허구와 관념으로 미국을 배격하고, 일본이 밉다 하여 모든 일을 감정적으로 대하는 것은 우리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상(實相)을 무시한 관념 도식으로 역사를 해석하고 자신 들의 정치적 잣 때로 역사를 심판하겠다는 정치권의 움직임도 실사구시 정신에 어긋나는 일이다.

맺음 말

이상에서 국가이념의 의의와 중요성 그리고 대북정책 내지 통일과의 관련을 생각해보았고 우리의 국가이념이 120여년 전의 개화사상에서 비롯되었음을 설명했다. 그런데 한가지 부언 할 것은 개화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기독교는 지난 1세기 동안 개화운동과 독립운동에 있어서 선도적 역할을 해 왔다는 사실이다.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이승만, 안창호, 장일환, 이승훈 등을 비롯하여 외국의 선교사들, 그리고 무수한 기독교 운동가와 순교자가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이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국가이념이 여러모로 도전을 받고 있다. 그러나 1000만 기독교인 건재 하는 한 우리의 국가이념은 반드시 지켜지리라고 나는 믿고 싶다.  

 

[1] 북예멘은 191`8년에 Ottoman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였고 예멘은 영국이 19세기 도안 보호령으로 지배해오다가 1967 철수하자 맑수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러자 수십만의 인구가 예멘으로 이주하였다.  20여년 동안 . 북이 적대관계로 대치해오다가 1990년에 통일이 실현 되었는데 후에도 내분이 계속되어 1994 중반 내란이 일어났고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현재의 인권 상태는 매우 좋지않고 언론, 집회의 자유도 법으로 제한되어 있다. 

[2] 개화사상에 관하여는 주로  인터넷 한국철학사연구회 엮음 [한국 철학사상사] 참조 인용 했다.

[3] 전게 철학사상사 p.401

[4] 필자는 이하의 견해를 동아일보 2004 9 18 과거 청산 역사가의 몫이다.” 에서 피력한 있음.

[5] 그의 방송은 영어로 이뤄졌기 때문에 손금성(孫金星) 박사가 통역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