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말씀은 신중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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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 3. 26 (토) 조선일보 A30면

 


 

늙은 나이를 빙자하여 무례를 무릅쓰고 대통령께 몇 마디 고언을 드릴까 한다. 대통령께서는 말 때문에 논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지난 주  3사관학교 졸업식에서 행한 발언도 그러한 예에 속한다. 보도에 따르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이제 우리는 한반도 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균형자 역할을 해 나갈 것”이고 “앞으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동북아의 세력 판도는 변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 사관학교 졸업생들은 이 나라 국방의 막중한 책무를 지닌 장교들이니 국군의 총수인 대통령은 그들이 자기 생명을 바쳐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이고, 어떠한 위협으로부터 어떻게 나라를 지켜야 할 것인지를 훈시 할 법도 한데, 난데 없이 동북아의 국제정치를 거론했으니 의아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말의 내용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동북아의 균형자 역할을 하겠다는 것은 듣기 좋은 말이다. 그러나 균형자 역할을 하자면 그에 상응하는 국력이 있어야 한다. 흔히 미국이 동북아에서 균형자 역할을 해왔다고 하는데 그것은 말로 한 것이 아니라 막강한 국력을 배경으로 지도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국제적 형국에서 한국이 균형자 역할을 하겠다 하면 한국을 둘러싼 4강들은 우리의 진의를 제멋대로 해석하여 냉소로 끝날 우려가 있다. 대통령이 그런 정책적 포부가 있다면 조용히 그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하고, 크고 적고 간에 결과가 나타나면 다른 나라들이 한국이 균형자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할 수는 있는 일이다. 호언장담보다 심모원려(深謀遠慮)가 외교정책의 정석으로 알려져 있다. 대학 교수나 할 수 있는 말과 대통령이 할 수 있는 말은 달라야 한다. 

이어서 노무현 대통령은 일본의 독도 망언과 역사 왜곡에 관련하여 “일본 의 패권주의를 반드시 뿌리 뽑겠다,” “일본과 외교전쟁을 불사하겠다”고 말했다 한다. 이 말은 외교 전쟁으로 안되면 무력전쟁이라도 해야 한다는 말로 들릴 수 있다. 대통령의 이러한 발언을 보고 “할 말을 했다,” 속 시원하다”고 박수를 치는 국민들도 적지 않고 곳곳에서 반일 시위가 계속되고 일본 상품 불매운동까지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할 점이 있다. 일본은 싫건 좋건 우리의 이웃 우방이고 최근에는 양국 정상이 과거를 역사에 묻어두고 미래 지향적으로 협력해 나가자고 다짐하기도 했다. 이것은 결코 가벼운 결정이 아니었다. 물론 일본이 이 약속을 어겼으니 국민들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반일 정서 수위가 도를 넘으면 대통령은 국면 조정자의 입장에 서야 한다. 일본의 잘못은 정부가 강력하게 대응할 것이니 국민들은 감정을 억제하고 건설적인 한일관계를 복원하는데 노력하자고 설득하면 그것은 점잖게 일본을 설득하는 길도 될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의 강경 발언은 오히려 국민을 앞서가는 느낌을 준다. 시민단체나 대중이 할 수 있는 말과 대통령이 하는 말은 달라야 한다. 그리고 대통령이 부적절한 말을 던져 놓고 사후에 그를 수습하기 위해 궁색한 변명을 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조선 후기의 개화주의 선각자들은 허구와 관념을 배격하고 실사구시의 가치관으로 자강(自强)을 도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지금 우리를 둘러 싼 4강에 역학관계가 미묘하게 돌아가고 있으니,우리는 앞으로의 활로를 찾기 위해 최선의 지혜가 필요한 시기이다. 화가 난 국민들도 이제는 한발 물러서서 선각자들의 교훈을 되새기고 우리의 진정한 국익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기 바란다. (1713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