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은 신(神)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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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9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지도 어느 듯  4 반세기가 지났다. 날이 갈수록 그의 리더십과 치적을 그리워하는 국민들이 많아지는 반면 그를 폄하하고 매도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다. 무릇 모든 나라의 역사에는 예외 없이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있고 그러한 역사의 주역을 담당한 지도자에게도 양면이 없을 수 없다. 박정희 대통령은 신이 아니다. 그의 부정적 측면을 합리화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긍정적 측면을 무시하거나 평가하지 않는 것도 잘 못된 일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필자는 흔히 듣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 박정희의 치적은 무엇인가? 

박정희 대통령은 한마디로 말해서 북쪽의 무력적화통일 전략을 거부하는 안보태세를 확립하는 동시에 이 나라 국민을 전통적 빈곤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데에 성공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1960년 10월에 발간된 미국의 권위지인 Foreign Affairs는 당시의 한국경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실업자는 노동인구의 25%, 1960년의 국민 1인당 GNP는 100불 이하이고, 전력 산출량은 멕시코의 6분의 1, 수출은 200만 달러, 수입은 2억 달러, 이래서 한국의 경제적 기적의 가능성은 전혀 없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원조계획의 가장 실망적인 국면은, 원조 계획이 생활수준 향상을 지속할 만한 성장을 가져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경제성장의 조건은 북한이 남한보다 순조로운 상태에 있다…결국 한국인들이 직면한 선택은 워싱턴이냐. 모스크바냐가 아니라 서울이냐, 평양이냐 하는 것이다."

이 비참한 현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현실은 경제적 빈곤과 침체 속에서 북쪽의 적화통일전략의 함정에 빠질 수 있는 일대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정치력과 지도력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이러한 국가적 위기 속에서 5.16 정변이 일어났고, 그 후 불과 18년 만에 세계의 최빈국 중의 하나였던 한국이 각광 받는 산업국가로 탈바꿈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 박정희 대통령 대통령을 독재자라 하는데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하는데, 적어도 3권 분립이 있고 지나칠 정도로 정부를 비판하는 국회와 언론이 있고 학생 데모가 끊이지 않는 나라를 독재국가라고 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그래서 외국의 학자들은 박정희 정권을 독재 정권이라 하지 않고 권위주의 정권이라고 부르고 있다. 독재 라기 보다는 민주주의가 나이 어리고 후진적인 대의정치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불상사가 일어났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매도하는 좌파들은 무지막지한 김일성-김정일 독재체제에 대하여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 박정희 대통령의 부정적 측면도 많지 않은가?

박정희 대통령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인권 유린, 정치적 탄압 등의 정치적 폐단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박정희 대통령을 보좌한 사람들의 과오인데, 대통령은 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그로 인해 후일에 비난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했다. 그러나 그의 철석 같은 신념과 강력한 리더십이 있었기에 경제개발과 근대화가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내외의 중론이다. 경제 개발에 성공한 한국, 대만, 싱가포르 역시 과거에는 권위주의 정치의 나라였다. 그로 인한 무고한 피해자가 있었다면 지금의 우리가 사과해야 한다.

  •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짓 밟지 않았는가 ?

내가 보기에는 박 대통령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모르거나 부정하고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가 새마을사업의 계획과 집행을 마을 사람들의 철두철미한 토의와 합의에 맡겨 새마을운동이 민주주의의 도장이 되게 하라고 장관들에게 지시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그러나 그가 한국의 정당정치에 혐오와 불신을 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그래서 정치는 내가 맡을 것이니 경제장관들은 오직 경제개발에만 전념하라고 당부하는 일이 몇 번  있었다. 그는 민주주의의 경제적 기초를 만드는 것이 자기가 할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엇갈리고 있는 평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지도자에게는 동지와 적이 있다. 지도자 밑에서 이득을 본 사람은 그를 미화하려 하고 나 자신도 지금 그를 변호하고 있다. 한편 손해를 본 사람들은 그의 나쁜 점만 들추어 내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 그에 관하여 중요한 것과 중요치 않을 것이 걸러지게 될 것이다. 사람은 본래 좋은 일을 기억하고 나뿐 일은 잊으려 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도자의 양면을 균형 있게 판단하고 거기에서 교훈을 얻도록 해야 한다. 지도자를 이념적 지도자와 실천적 지도자로 구별할 수 있다. 영국의 민주혁명의 이념적 지도자는 존 록과  J. S. 밀 등이 널리 알려져 있고 실천적 지도자로서는 크롬웰 (Oliver Cromwell)을 들 수 있다. 미국의 혁명에는 영국의 존 록의 영향을 받은 매디슨과 해밀턴 등이 이념의 지도자였고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실천적 지도자는 워싱턴과 링컨이 유명하다. 우리나라의 이념적 지도자는 백범 김구 선생, 도산 안창호 선생, 해공 신익희 선생 등을 들 수 있고 실천적 지도자로서는 물론 이승만,  박정희  두 대통령을 들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할 점이 있다. 이념적 지도자는 현실을 비판하고 이상을 드높인다. 그러나 실천적 지도자는 이념을 현실에 적용하려 할 때에 엄청난 난관에 부딪치고 때로는 그 이념에 반하는 행동이 강요되는 경우도 있다. 영국의 크롬웰이 그 좋은 예이다.  영국 청교도혁명의 지도자인 크롬웰은 국왕의 전제주의와 왕당파와의 치열한 전쟁에서 영국의 의회주의를 승리로 이끈 영웅이다. 그는 국왕 찰스 1세의 처형, 왕정의 폐지, 귀족원의 폐지, 공화국 선언 등으로 영국의 민주화를 실현했다. 그러나 1653년 호민관으로 취임한 후에는 왕당파, 장로교파 그리고 급진파인 레벨러(수평파라고 하기도 함) 등 반대세력을 가차 없이 탄압하였고 전국을 11개 軍區로 나누어 군인통치를 실시했다. 의회주의와는 정반대의 행동이다. 그는 1658년에 병사하였는데 찰스2세가 왕정을 복구하자 그의 부왕을 처형한 보복으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매장된 그의 시신을 파내 효수(梟首)형에 처했다. 그러나 영국의 encyclopedia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그는 영국을 위대한 나라로 만들었고 그의 치적에는 질서의 확립, 경제의 재건, 종교적 관용의 실현, 교육기회의 확대, 사회 정의의 실현 등이 포함된다"

우리 나라에서는 글과 말로 좋은 소리를 하는 지도자에게는 존경을 표하지만 나라의 각박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흙탕물에 뛰어든 실천의 지도자는 옷에 흙을 묻혔다 하여 지나치게 깎아 내리는 경향이 있다. 김구선생의 동상은 있어도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은 있던 것도 끌어 내렸고 박정희 대통령의 동상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념의 지도자를 존경해야 하지만 동시에 행동의 지도자도 이해하고 존경해야 한다. 톨스토이는 "이해하는 것은 용서하는 것” 이라고 하지않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