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 디노미네이션 서둘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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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9. 22 (월) 매일경제신문 3면 기고


 

한국은행이 고액권 화폐발행을 검토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고액권을 발행할 바에야 차라리 [디노미네이션-denomination]을 선택하라고 권하고 싶다. 디노미네이션이란 예컨대 1000원을 1원으로 단위를 바꾸는 것으로 예금을 동결하는 화폐개혁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시행 일자를 미리 공고하고 공개적으로 만반의 준비를 갖출 뿐 아니라 시행일 이후에도 상당 기간 옛 화폐의 통용.교환이 보장된다.

디노미네이션는 조만간 불가피해진다. 예컨대 2007 말의 우리나라 국부는'5645조원'이상이 것이다. 천문학적 수치를 제대로 읽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실제로는 15645兆원으로 읽어야 한다. 이러한 천문학적 숫자는 읽기도 힘들고 일상 거래 때나 계산 회계장부 처리에 효율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1960 이래 23개국이 32차례 디노미네이션을 실행했고 그 중 1000분의 1 단위 절하가 13건으로 가장 많았다.

한 나라의 환율은 대외적 위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대미 달러 환율이 높을수록 경제 운영상 후진성을 나타내는 표상이 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대미 환율이 1000 단위를 넘는 나라는 인플레이션으로 유명한  멕시코와 터키 그리고 한국뿐이다.  그러나 한국은 이미 선진국 못지않은 물가안정 기조가 정착 되었으므로 인플레이션 국가라는 오명을 씻기 위해서라도 디노미네이션를 생각할 때이다. 

뿐만 아니라 북한의 대미 공정환율이 150원인데 이것이 비록 시장실세를 무시한 허망한 숫자라 할지라도 어쨌든 남북간 환율 설정은 불가피해질 것이다. 우리 화폐가치가 북한보다 낮다고 하면 북한 동포들의 착각을 피할 없을 것이다.

물론 디노미네이션를 실행하는 데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첫째로 화폐의 제조, 신구(新舊) 화폐의 교환,  컴퓨터 시스템의 변경, 자동판매기 등 각종 자동화 기기의 개폐, 각종 회계장부, 전표류의 변경 등에 적잖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 그러나 가전 제품처럼의 비용이 들더라도 무거운 것을 버리고 가볍고 간편한 것을 택하는 것이 결국은 유리하다. 

둘째로 디노미네시션을 하면 가격의 우수리 절상으로 약간의 인플레에션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고, 새로운 화폐 단위에 대한 환각(幻覺) 때문에 소비 행태가 달라질 수 있다는 분석이 있다.

그 여부(與否)는 디노미네이션를 실시할 당시의 경제사정에 달려 있다. 가령 인플레이션 시기에 디노미네션를 단행하면 우수리 절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효과가 있는 반면, 갑자기 돈의 가치가 귀해진 것 같은 환각 때문에 소비가 위축되는 디플레이션 효과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불경기 시에는 반대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요컨대 여러 나라의 실제 경험을 참조해 시기 선택에 주의하면 되는 일이다.

일본에서 이미 세 차례나 디노미네이션 시도가 있었으나 실현 되지 못한 점을 들어 심중을 기하라는 소리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보수주의와 정치력 부족 때문에 필요한 구조조정 이 지연되고 있는 일본을 본 받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우리가 먼저 하면 일본은 큰 자극을 받을 것이다.

경제적 혼란을 가져올 염려가 있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1년 전 유럽연합(EU) 화폐개혁이 참고가 될 것이다.  EU 회원국 중 12개국이 2002년 1월부터 자국 화폐를 유로(EURO)로 교환하기시작 했는데, 불과 수 주일 만에 참가국에서 유통하던 지폐 90억장과 동전 1070억 개가 대부분을 별 탈없이 EURO로 교환했다는 보고가 있다. 그것은 1999년 EU 결정 후 3년에 걸쳐 회원국 중앙은행들이 치밀한 준비를 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충분한 준비를 하면 경제적 혼란을 피할 수 있다. 

또 한가지 그럴 듯한 반론이 예상되는데 은행 보증 수표거래가 성행하는 지금은 계좌추적이 비교적 용이한데 고액 현금 거래가 일반화하면 부정과 부패 방지가 어려워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1만 달러이상을 예금하면 은행은 반드시 세무서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다. 은행이 고액 현금 거래를 실명화 하도록 의무화하면 거래 추적은 여전히 가능하다. 어쨌든  범죄는 계좌 추적 만으로는 막을 수 없다.  

요컨대 은행의 자기앞수표가 화폐 자리를 빼앗고 있고, 천문학적 숫자를 사용하는 화폐제도는 영속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차제에 대미 환율이 1대 1.2 정도가 되도록 디노미네이션을 준비하라고 정책당국에 권하고 싶다. (2195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