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관계와 이념의 위기

  


요즈음 남북문제를  둘러싸고 이념의 갈등이 있다.
    이러한 때일수록 우리의 국가이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념의 갈등 > 지금 남한에서는 이념적 갈등이 표면화  되고 있다. 남북의 화합과 통일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으련만 일부에서는 " 보수반동 세력"이 통일노력을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정부가 주체성을 잃고 북한 독재체제의 전략에 말려 들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서 제기되는 근본 문제는 우리가 어떠한 통일을 원하느냐 하는 것이다.

일부 논자들은 민족의 통일이 모든 가치에 우선하므로 모든 것을 덮어 두고 통일부터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덮어놓고 통일을 해야 한다면 북한은 자기식 통일을 전제로 할 것이고 남한도 그 점은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이 주장은 매우 비현실적 주장에 불과하다.

혹자는 남북간의 이념적 통합이 가능하지 않느냐고 할지 모르나 이것도 탁상공론(卓上空論)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능하려면 북한이 최소한 다당제와 자유선거를 받아드려야 하는데, 만약 북한이 그것을 받아드리면 그것은 이미 자유민주의 스펙트럼(spectrum)에 포함되는 것이니 통합이 아니라 일원화로 보아야 할 것이다.(소유제도와 분배문제등의 정책적 통합과 자유민주와 독재의 체제적 통합은 서로 다른 문제이다.)

그렇다고 자유 민주와 독재체제가 공존하는 통일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통일이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남북 통일에는 이념과 체제의 선택이 불가피하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남한의 국가이념은 자유민주와 시장경제체제 (실은 사장경제는 자유만주주의에 포함되는 개념이다.) 이고 대다수 국민들은 이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드리고 있다.

그런데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동일시하여 그에 대한 회의를 갖는 사람도 있고, 특히 냉전시대의 자유민주주의와 지금의 그것은 서로 달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기야 자유를 제도화한 것이 민주주의인데 그 내용에 있어서는 시대에 따라 또는 나라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사회의 근본문제는 빵과 자유의 문제인데, 공상주의 일당 독재 체제는 그 어는 것도 만족스럽게 해결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양자를 양립시킬 수도 없는 체제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반면에 자유민주체제는 그 내용이 다양하지만 기본적으로 경제 발전과 자유와 인권의 신장을 가능케 하는 체제라는 것이 오늘의 보편적 인식이다.

물론 민주사회에서는 사상과 언론의 자유가 있고 우리 헌법에 규정된 국가이념을 비판할 자유도 있다.  그런데 언론의 자유가 있는  곳에서 소수는 목소리를 드높이고 다수는 침묵하고 있으면 그 사회는 소수에 의하여 끌려가는 의외의 사태를 가져 올 수 있다. 그러므로 대다수 역시 기회 있을 때마다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고 그래야 그들이 믿는 가치와 신조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하여튼 국가이념을 지키는 데에는 정치 지도자들의 책임과 역할이 중요하다. 먼저 정치 지도자가 남북 관계를 논할 때에는 헌법에 규정한 국가이념이 무엇인가를 국민에게 분명히 말해 주어야 한다. 국가이념이 분명하지 않으면 국민들의 정신적 구심점이 없어지고, 민족 통일의 의지와 지표를 잃게 된다. 미국에서는 지난 200여년 동안 38인의 대통령이 나왔는데 취임 연설에서 미국의 국가이념(자유와 민주)을 강조하지 않은 대통령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러한 연면(連綿) 부동의 국가이념이 미국을 떠 바쳐 온 정신력이 아닌가 한다.  

남한에 이념상의 갈등이 있는 것은 우리의 대의정치의 현실이 아름답지 못한 데에도 원인이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요건은 언론, 집회, 선거, 거주, 통신, 여행의 자유와 인권 중시와 함께 자유에 상응하는 의무와 책임인데 우리들은 이러한 요건들의 가치를 철저히 인식하거나 실천하지 못하고 있고 그것은 구태의연한 우리나라의 대의정치의 혼탁에 여실히 나타나 있다.

김영삼, 김대중 두 대통령은 천신만고의 민주화 투쟁 끝에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는데 예나 다름이 없는 오늘의 정치적 혼탁의 양상을 보면 그들의 민주주의가 정권 획득을 위한 구호의 범위를 넘어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이해와 경륜에서 출발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두 대통령 외에도 많은 민주화 운동가가 있었고, 그들 또한 고난을 겪으면서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다가 지금은 대의정치에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 또한 정치적 구습을 쇄신하는 데에 앞장 서기보다는 오히려 구습에 말려 들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들이 말하는 남한의 ‘독재’에는 항거하면서도 북한의 세습독재의 처참한 현실에 대하여는 입을 다물고 있다. 결국 그들이 부르짖던 민주주의는 남북 대치의 대극(對極)에서 북한의 체제와 이념에 동조하는 일종의 좌파적 반체제 운동에 불과하지 않았나 하는 인상을 준다.

물론 이 밖에 민주주의의 참 뜻을 깊이 이해하고 그것이 정치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생활철학과 정신적 지주가 되도록 국민을 계도하고, 대의정치의 선진화를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정치인과 지식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부분은 아직 유력한 정치지도자로 부상하지 않았고 따라서 영향력도 그다지 크지 않은 것 같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자면 정치인들 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가 자유민주체제의 가치를 인식하고 그를 수호하려는 결의와 협력이 필수적이다. 특히 자유의 대가는  의무와 책임인데 지금 우리 사회에는 민주의 이름으로  불합리한 행동과 떼를 쓰는 일이 유행하고 있고, 언론과 집회의 자유가 있다 하여 집단적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아직도 집단 데모에 각목과 화염병이 난무하고 있는 실정이다.

<북이 어떻게 볼까>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취약점은 남북관계와 관련해서도 걱정이 된다. 즉 그것은 평양의 오판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는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은 " 남조선은 경제적으로는 우리보다 앞서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우리가 더 강하다"라 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가 무슨 뜻으로 이 말을 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짐작이 가는 점이 없지도 않다. 아마도 그는, 북한은 유일체제로 길 들여진 인민들이 "우리식 사회주의” 기치하에 일치단결해 있고, 그의 교시에 무조건 따르는 인민들에 의하여 일사분란의 사회질서와 기강이 확립되어 있는데, 남한에서는 끝없는 정치싸움, 부정부패, 무질서, 부도덕한 자본가가 판치고 있으니 힘으로 밀어 부치면 쓸어질 것 같은 사회처럼 보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냉전의 긴장 속에서 반세기 동안 철저한 사상교육을 받아온 북한 주민들은 의지력과 생활력에 있어서 남한의 나약한 젊은이들과는 비교가 아니 된다고 보고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남한의 국민들조차 민주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 면이 있지 않은가.

< 지도자의 책임> 우리의 이념적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조속히 우리 자체의 정치,사회적 병폐를 일소(一掃)하는 것인데, 그러나 그것은 일조일석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정치 지도자는, 정치-사회적 치부를 청산하는 데에 앞장 설 뿐 아니라, 우리사회에서 펼쳐지고 있는 모든 취약점에 불구하고 왜 자유민주체제가 우리의 최선의 선택이냐 하는 것을 남한 국민은 물론 북한 동포에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정치 지도자는 보기 드물고, 많은 국민들은 자유민주주의를 한 낯 정치적 구호로만 알고 있다. 북한 정부 조직에는 선전 선동부가 있어서 인민들의 세뇌공작에 전력을 기우려 왔는데 남한에서는 정치 교육은 고사하고 국가이념마저 무 방비 상태에 있다.

지금 정부가 남북간의 화해 협력을 추구하는 것은 결코 체제의 차이를 무시하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때일수록 정치 지도자들은 국민들에게 자유민주의 국가이념을 선양하는 데에 앞장서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정치 지도자는, 남한에서 대의정치의 난맥상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자유민주체제를 수호해야 하는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들의 무력으로 아직은 대의정치가 후진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자유선거를 통하여 국민들이 선택한 선량들이 민의를 내걸고 정당을 통해 다투고 경쟁하는 가운데 이 나라의 발전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 지도자는, 민주주의의 특징인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이해(利害)와 견해가 충돌하고 때로는 무질서와 방종을 연출하지만 결국은 그것들이 자유로운 토론과 타협에 의하여 조정 통합되고, 오히려 그러한 과정이 사회 발전의 에너지가 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 지도자는, 민주사회에서는 언론의 자유를 통하여 모든 사회악이 백일하에 들어 나지만 그러한 투명성이 있기에 비판과 반성과 대책이 따르게 되는 것이므로 언론의 자유는 철저히 보장되어야 한다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 지도자는, 시장경제 체제하에서 일부 자본가의 추악한 모습이 드러나지만 일반적으로 기업가의 자유로운 기업활동에 의하여 경제가 발전하고 공산주의 체제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있으므로 시장경제체제를 수호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끝으로 정치 지도자는 민주적 대의정치는 가장 운용하기 힘드는 정치체제이지만 경제적 번영과 인권과 자유를 신장하고 기본적 정치 안정을 보장하는 체제인 반면, 모든 독채체제는 조만간 파국으로 끝난다는 것이 역사의 법칙이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정치지도자와 지식인들이 많이 있어야 지금의 이념상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새로운 차원의 민주화 운동을 추진하는 정치지도자의 출현을 바라고 있다. 정권 획득의 명분이나 좌파적 반체제 운동의 구호로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참뜻과 높은 이상을 제시하고 건실한 민주사회를 건설하는 데에 이바지하는 새로운 정치지도자를 대망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 학생과 지식인들도 생각할 문제가 있다. 공산당이 지배하고 있는 중국에서는  1986년 이래 민주화운동이 계속 되어 왔고 1989년 6월에는 세계를 놀라게 한 천안문 유혈 사건이 있기도 했다. 중국의 민주화운동은 맑스-레닌 주의를 타파하고, 언론과 집회의 자유, 자유선거에 의한 국민의 정치 참여등을 요구하는 운동이다. 그런데 우리의 일부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은 북한의 사회주의 일당 독재 체제를 미화하고 그들의 대남 전략에 동조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역사의 시계 바늘을  꺼꾸로 돌리려는 운동인데 어찌하여 학생시대의 금과 같은 시간을 그런 일에 낭비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면 위에서 말한 새로운 지도자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지도자를 말함 일까 ? 여러 가지 측면이 있겠으나 한가지 예를 들고 나의 말을 끝내려 한다. 필자는 학생시대에, 외지에 보도된 영국의 대의정치의 한 단면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일이 있다. 당시는 6.25 동란이 끝날 무렵인데 영국 칸타베리 성당의 존슨이라는 주교가 북한을 다녀 와서 한국전쟁에서 연합군이 세균전을 쓰고 있다고 공언하였다. 존슨 주교는 좌경 종교인으로서 소련의 스타린으로부터 평화상을 받은 일도 있었다. 영국은 UN 연합군의 일원으로 한국에 파병하고 있는 터에 주교가 이러한 충격적인 발언을 함에 정치 문제로 비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 의회는 먼저 대주교를 의회로 불러내어 사실무근의 풍설을 퍼뜨린 존슨 주교를 파문할 용의가 없느냐고 물었다.  대주교 가로되, 불행히도 존슨 주교는 하느님의 섭리가 북한에서 더 잘 실현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나 하느님을 부정하지 않았으므로 파문할 수 없다고 답변하였다. 그러나 의회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어서 Churchill 수상을 불러 냈다. 처칠은 이렇게 답변하였다. "모든 고귀한 것에는 대가가 있다. 자유는 고귀한 것이다. 고(故)로 대가가 있다. 그 대가는 관용과 인내이다. 존손의 말은 대단히 불쾌하지만 참을 수 박에 없다."   (하기야 참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반대자는 언제나 자신의 견해와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후 Churchill은 80회 생일날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야당인 노동당수 Clement Attlee가 쳐칠의 공직 생활 중의 국가에 대한 공헌을 치하하여 처칠의 초상화를 기증하기로 했다. 증정식에서 Attlee와 쳐칠이 주고 받은 축사와 답사가 또한 매우 감동적이었다. 그후 정책토론으로 들어가 처칠에 대한 질문이 시작되었는데 노동당의 Ernie Bevin이 일어나서, " 귀하의 공로를 치하하여 초상화를 증정한 뒤에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하고 말문을 열자 쳐칠은  손짓을 하며 "Please do your duty" (당신의 의무를 다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그후 Bevin의 신랄한 공격이 시작되고...

 성숙된 대의정치와 식견 있는 정치 지도자란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의 대의정치는 언제나 이 수준이 될 것인가. (01년 3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