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경협과 통일의 조건


2001년 2월 23일 [자유지성300인회], 그리고 2월 27일 한국무역협회 주최 화요포럼에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것임


1. 남북경협의 논리 

<경제협력의 현황> 작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에서의 합의에 따라 앞으로 남북간의 경제협력이 확대될 전망에 있다. 참고로 작년의 남북간의 경제교류의 현항을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먼저 교역면에서는 1988년 간접교역에서 출발하여 2000년에는 약 4억2천만 달러의 거래실적을 보이고 있는데 이 중 약 반수는 KEDO, 금강산 관광사업과 같은 비상업적 거래에 의한 것이다. 금강산 관광 사업을 통하여 35만명 이상이 북한을 다녀 왔다. 남북교역에 참여한 업체 수는 약 580개 인데 이중 132개는 주로 섬유류의 위탁가공을 하는 업체들이다. 투자사업에 있어서는 정부 승인을 받은 17개 사업 중 대우, 현대, 태창, 평화 자동차 등 4건의 투자가 성사되었다1. 작년 12월 16일 투자보장, 이중과세방지, 청산결제, 상사분쟁 해결에 관한 합의서가 교환되었으므로 대북투자가 촉진 될 것으로 보이기는 하나, 북한의 열악한 투자환경 때문에 대북사업의 성공 여부는 낙관할 수 없다. 작년 12월 16일에 끝난 4차 평양 남북 장관급 회담에서 북측이 200만㎾의 전력 지원을 요청하였고 그 중 일차적으로 50만㎾의 전력을 공급해 달라는 요구가 있었으나 우리 정부는 먼저 북한 전력사정의 실태 조사부터 하자는 제의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남북경협추진위원회 2차 회의가 2월 중 서울에서 열리며, 이 회의를 전후하여 전력협력, 임진강 공동수방, 경의선 복원, 개성공단 등 4개 실무협의회가 잇따라 열릴 예정이다.

<남북경협의 논리> 남북 경제 협력은 통일을 촉진한다는 전제하에 추진되고 있는 것인데, 정부는 남북 사이에 평화체제를 정착시키고 세가지 교류, 즉 이산가족, 경제, 문화 및 체육 등의 교류를 계속하면 민족의 신뢰와 동질성이 회복되고 20년 혹은 30년 후 에는 자연스럽게 통일이 실현될 수 있다고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남북 경협이 쉽게 통일로 연결되느냐 하는 데에는 의문이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경제교류와 통일사이의 연결 고리는 무엇 보다도 평양의 체제 전환이라 생각되는데 이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평양은 경제적 필요에서 그들의 봉쇄체제를 개방하는 것이 불가피한데, 그렇게 하면 주민들이 외부세계에 눈뜨게 되어 민주화의 갈망이 높아지고 현실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어 평양의 체제 유지가 어렵게 되는 모순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체제의 모순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이 남북 뿐만 아니라 타국과의 경제 협력의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변화의 조짐 > 다행히 북한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김정일 노동당 총비서는 최근 “현존 관념에 묶여 지난날의 낡고 뒤진 것들을 고집해서는 안되며 포기할 것은 포기해야 한다”, 또는 “낡은 관념을 버리고 새로운 사고방식,새로운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하여 신사고론을 제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김정일 위원장은 1월 15일부터 20일까지 정부 고위 인사들을 대동하고 비공개리에 중국을 방문하여 개혁.개방의 본거지인 上海와 외국 합작 기업이 모여있는 浦東 공업단지를 두루 살펴보고, 상해 증권거래소를 세 번  이나 방문하였다 한다. 이것은 그가 외국자본과 외국투자 유치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어서 김 위원장은 朱鎔基 총리와 면담하고 姜澤民 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김 위원장은 중국의 발전상에 놀라움을 표시하고 중국의 개혁 개방 정책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한다. 이러한 보도를 보고 북한이 `제2의 중국'을 지향하고 있다는 말 들이 나오고 있다. 북한이 ‘제2의 중국’을 지향한다는 것은 공산주의 독재체제를 유지하되 개혁과 개방을 통해 인민들의 경제활동의 자유의 폭을 점차적으로 넓혀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북한이 제2의 중국을 지향한다면, 중국의 개혁 과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것이 북한과 남한에 무엇을 시사하는 것인지 알아 볼 필요가 있다.

2. 제2의 중국? 

<권력구조 개편> 첫째로 중국에서는 毛澤東 체제에서 개방과 개혁을 추구하는 鄧小平 체제로 이행하는 정치권력구조의 개편이 있었다. 1978년 중공 11기 3중전회는 중국역사의 전환점을 이룬다. 문화혁명 10년(1966-76)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고 계급투쟁 대신에 경제발전을 당의 목표로 삼고, 정치, 경제, 사회 체제 전반의 개혁을 추진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어서 정치권력은 모택동의 후계자로 지목된 화국봉(華國鋒) 체제에서 양상곤(楊尙坤) 호요방(胡耀邦), (趙紫陽) 이붕(李鵬) 등의 등소평(鄧小平) 체제로 개편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체제의 출범에는 모택동 30년의 평가와 잘못된 과거사의 청산이 필요하다는 인식하에 1980년, 35명의 판사로 구성되는 특별재판소를 설치하여 4인방(幇)과 림표(林彪)2 일당(6명)을 심판하고 2만여자의 유죄 판결문을 선고 하는가 하면, 3만5천자에 달하는 [중국인민공화국 창건 이후 우리당의 역사에 관한 약간의 문제에 대한 결의]를 채택하여 과거청산에 매듭을 짓고 4대 현대화 사업 (2000년 까지 농업, 공업, 과학기술, 국방 등 4개 분야의 현대화를 목표로 함)을 출범시킨 것이다3.

북한에서 과연 이러한 권력구조의 개편과 과거사의 청산-그것은 남측과도 크게 관련되는 문제이다- 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는 일이다.

<체제의 모순> 둘째로 중국은 경제적 진보주의와 정치적 보수주의 사이의 격렬한 충돌을 경험하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등소평은 四項政治基本原則 을 제시했는데 그 내용은 (1) 사회주의 견지 (2) 민주적 專制 (3) 공산당의 지도 (4) 맑스-레닌주의 및 모택동 사상의 견지이다. 즉 경제면에 있어서는 국제사회에 대한 문호개방과 시장경제의 도입을 추진하되 정치면에 있어서는 모택동 이래의 일당 독재체제를 견지한다는 것이 그의 기본 노선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2원주의 때문에 4항 원칙을 지지하는 혁명 제1세대와 경제개혁과 함께 정치체제의 개혁의 병행을 주장하는 제2세대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빚어졌고, 그것은 마침내 1989년 6월의 천안문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등소평은 자기 후계자로 지목했던 호요방과 조자양을 민주화 세력에 동조하였다 하여 자기 손으로 숙청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호요방은 장노들의 제일선으로 부터의 퇴진, 군부의 세대교체, 당정분리 등을 요구하는 정치개혁을 추진하다가 그를 지지하는 학생데모 (1986년 천안문 사건) 때문에 실각하였고, 조자양 역시 경제개혁, 정치개혁 병행론을 주장하고, 1989년 천안문 학생 데모 당시 계엄령 선포를 반대하다가 당으로부터 실각하고 말았다. 결국 등소평의 개혁 파라다임의 한계를 들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의 경험이 제기하는 문제는 개방과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경제개혁과 민주화를 지향하는 정치개혁을 어떻게 적절히 조화시켜 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그랬거니와 경제 발전에 상응하는 정치적 민주화를 추진하지 않으면 광주 사태와 천안문 사건과 같은 비극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북한이 처음부터 경제개혁과 정치개혁을 병행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대 혼란을 가져오고 어느 쪽도 성공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방에 따르는 내부 변화에 어떻게 대응해 나가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고 남북관계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민주화 운동> 셋째로 천안문 사건이 진압된 후 1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그 동안 중국의 정치, 사회는 평온한 것 같고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면 중국에서는 정치개혁의 필요성과 동인(動因)이 사라진 것이냐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이 질문에 답하자면 중국의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잠시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는 1989년의 천안문 사건을 일과성의 돌발 사태처럼 보는 경향이 있는데 실은 그 배후에 끈질긴 민주화 운동의 역사가 있다.

주요한 민주화 운동으로4 1976년 모택동 사망(9월 9일) 이후 4인방 타도를 외치는 천안문 데모사건, 1986~7년의 호요방의 정치개혁을 지지하는 제2의 천안문 데모사건, 그리고 1989년 6월4일, 군대가 학생과 시민들을 무참히 살해한 제3의 천안문 사건 등이 있다. 학생데모가 있을 때 마다 학생과 시민 그리고 민주화 운동을 전개한 지식인들 다수가 구속되어 모진 수난을 겪어야 했다. 민주화 운동으로 유명한 인사 중에는 工員 魏京生, 언론인 유빈안(劉賓雁), 작가 왕약망 (王若望), 그리고 물리학자 방여지(方勵之) 등이 널리 알려져 있고 이 밖에도 국내외에 많은 운동가들이 있다.5

 <중국의 장래> 천안문 사건 이후 민주화 운동이 죽어버렸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많은 운동가들 (魏京生 陳子明 徐文立 王希哲 沈良慶 王丹 王有才 등)은 형무소를 들락 날락 하면서 민주화 운동을 계속 하였고, 당국은 특히 처치 곤란한 운동가들을 신변치료의 명목으로 가석방하여 미국으로 추방하는 예가 많았다. 한편 미국에 망명한 운동가들은 1998년에 中國民主黨을 결성하여 王若望을 당수로 추대하는가 하면 自由中國聯合을 결성 하기도 했다. 한편 국내에서는 王有才가 야당인 '中國民主黨'을 결성하자 관계자들이 구속되는가 하면, 같은 해 운동가들이 조직한 '中國發展聯合會'가 북경에서 제1차 전국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조자양 총서기의 일급 참모 였던 포우(鮑尤) 는 1999년 당 간부들에게 천안문 사태는 당의 실책이었음을 인정하라는 공개장을 보낸 일도 있다.

지난 1월 (2001)에 특이한 책이 출판되었다. 천안문 사건 당시의 중국 공산당 정치국과 공안당국의 비밀문서가 미국으로 밀반출 되어 그것이 [The Tiananmen Papers]라는 책자로 출간된 것이다. 편자는 Zhang Liang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가명이고 영문 편집은 Columbia 대학의 Andrew J. Nathan 교수와 Princeton 대학의 Perry Link 교수가 맡고 있다. 중국 당국은 이책의 문서가 가짜라는 성명을 내고 있으나, 하여튼 이책에는 학생 데모에 대한 시각과 대응책에 관하여, 개혁파 조자양과 노장보수파를 대변하는 이붕 사이의 격렬한 논쟁과, 그리고 조자양이 실각하는 과정이 생생하게 들어 나 있다.

조자양은 학생데모에 대한 근본대책은 학생들의 요구를 받아드려 정치개혁을 약속하고 대화를 계속하는 것이고 계엄령 선포는 사태를 악화할 뿐이라고 주장하였고, 이붕은 학생데모는 극소수의 불순 분자들이 대다수 선량한 학생을 선동하고 외세에 영합하여 부르죠아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것이고 그것은 등소평이 제시한 4개 원칙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므로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당내 분열을 지켜본 등소평의 최종 판결은 “학생들의 반란 목적은 공산당을 타도하고 사회제도를 전복하는 것과… 서방측에 완전히 종속하는 부르죠아 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이므로 계엄령 선포가 불가피하다는 것이었다. 앞으로 이 문서의 중국어판이 나온다고 하는데 편자 Zhang Liang은, 이 문서를 출간하는 목적은 당이 덮어 버린 천안문 사건의 뚜껑을 다시 열어 진실을 밝히고 당 자체에 의한 민주화를 촉진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중국의 민주화 운동에 관련하여 한가지 느끼는 점이 있다. 중국 학생들과 지식인들은 공산 독재를 극복하기 위하여 민주화 투쟁을 해 왔는데 그들은 중국의 진보 세력이고 현체제를 고수하려는 노장파 들이 보수 세력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북한의 개혁 개방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세력을 보수라 하고 평양에 동조하거나 관용적인 일부 학생들과 지식인들의 주장을 진보라 한다. 남한의 일부 학생들은 중국 학생들과 정반대의 "민주화"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시장경제와 민주화. 그러나 민주화는 집권세력에 대한 투쟁만으로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개방과 시장경제의 침투 자체가 기성의 체제이념을 무력화하는 또 하나의 동인(動因)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등소평의 경제개혁이 크게 성공하여 중국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등소평이 제시한 맑스-레닌 및 모택동 사상 견지의 원칙이 이미 사문화 된 것도 사실이다. 지금의 중국 공산주의는 이름 뿐이고 지도부 자체가 맑스-레닌주의를 믿지 않고 있으며, 다만 그것을 기득권 유지를 위한 방패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중국은 이미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넜고 지금의 변화의 방향 즉, 국제화, 정보화, 민주화의 방향을 거역할 수 없을 것이다. 필자가 만난 중국학자들은 무역을 개방하고 WTO에 가입하면 이러한 추세는 더욱 촉진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정보화 또한 중국의 정치체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지금 중국에서는 인터넷 단말기가 이미 1400만대를 넘어 섰고 1999년 한해에 중국대륙에서 판매된 이동전화는 2000만대에 이르고 있다. 중국 공산당 제17회 전당대회가 개최되는 2002년에는 이동전화를 사용하는 인구가 1억에 달할 것이고 전인구를 12억으로 잡으면 12인에 한대 꼴의 보급율이 될 것이라는 보고가 있다6. 지금 기술 발달(IMT)에 따라 인터넷을 휴대용 전화로 볼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는데, 인터넷과 이동전화의 보급은 정부에 의한 정보통제 넷트웍의 붕괴를 의미한다. 이동전화와 인터넷을 통하여 세계적 스케일의 정보교환이 이루어 질 때 중국인들의 세계관, 특히 자유와 민주화에 대한 각성이 높아질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중국 지도부가 이러한 추세에 어떻게 대응할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이미 현실성을 잃은 공산주의 대신에, 호요방과 조자양 그리고 많은 지식인들과 학생 들이 주장해온 사회민주의 방향으로 국가 이념을 재정립하고, 점진적으로 정치개혁을 추진하게 될 것이다.

북한이 제2의 중국을 지향한다는 어느 의미에서 좋은 일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중국의 경험을 거울로 삼는다면 앞으로 북한의 개혁 개방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을지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바라건대 평양은 출발 시부터 현존 체제의 한계와 장래를 심사 숙고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불필요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가 아닌가.

 3. 북의 선택과 우리의 대응

<북의 선택> 김정일 위원장이 중국의 발전상에 큰 충격을 받고 어떠한 방향 전한을 결심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토록 주체사상을 강조해온 그가 어느 정도로 “우리식 사회주의”의 틀에서 벗어나 개혁-개방을 추진 할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아마도 외부와의 경제 교류를 적극적으로 받아드리되 동시에 사상통제를 한층 강화하고 가급적 주민을 외부세계로 부터 격리시키는 종래의 정책노선을 유지하지 않을까 보아진다. 이점에 관련하여 김정일 위원장은 얼마 전에도 "브르죠아 자유화에 오염되면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잃어 버리게 되고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을 갖게 되어, 최후에는, 자신의 조국과 인민을 배반하는 길로 끌려 들어가게 된다.” 고 군인들에게 경고한 일이 있다7. 이러한 보수적 사고방식을 하루 아침에 바꿀 수 있는 것일까? 어디에서나 기성 정치권력의 교체없이 발상 전환과 개혁이 이루어진 예는 극히 드물다.

어쨌든 평양이 어느 정도 개혁-개방으로 선회하여 남한과 외국으로부터 경제원조와 성장요인을 받아드리면 한 동안 비교적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고 따라서 민생이 호전될 수 있기는 하다. 중국의 경험이 말해 주듯이, 개발초기에는 독재 정부가 능률을 발휘할 수 있다. 거기에는 노사 분규도 없고, 집단 이기주의도 없고, 지가보상제도 없고, 정치 싸움도 있을 수 없다. 중앙 정부가 개발사업을 계획하고 결정하면 일사천리로 추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야말로 평양의 선택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기가 된다. 여기에서 두 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평양이 경제 호전에서 자신을 얻고 그에 상응하여 시장경제의 범위를 넓히고 개혁, 개방을 더욱 추진하여 주민들의 자유를 창달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큰 위험이 따를 것이다. 독재는 풍선을 물속에 눌러 두는 것과 같고 손을 놓으면 물위로 튀어 오른다. 통제를 완화하면 그 동안 억눌렸던 불만과 욕구가 일시에 폭발할 위험이 있다. 만약 평양이 이러한 내부 폭발을 슬기롭게 처리하고, 점진적으로 민주화를 도모한다면 개혁과 성장 사이의 양 순환이 작동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한은 물론 국제사회는 한층 더 고무되어 북한에 대하여 경제 협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고 한반도에 한강의 기적에 이어 대동강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할 것이다.

둘째의 시나리오는 평양이 경제 호전에 자만하여 그를 위대한 김정일 동지의 영도의 덕택이고 유일체제와 “우리식 사회주의”의 승리라고 선전하여 독재체제의 공고화를 꾀한다면, 개혁 개방에는 더 이상의 진전이 없고, 경제는 다시 침체 국면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고 남한과 국제사회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평양은 체제에 대한 더욱 거센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동안의 개방의 결과로서 주민들이 외부 세계와 접촉할 기회가 많아졌고 보다 많은 정보에 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독재 체제라 해서 정보화의 세계적 추세를 외면할 수는 없다. 평양을 다녀온 포항공대 박찬모 교수의 보고에 따르면8 평양은 96년이래 통신시설 보수, 전화의 자동화, 디지털화를 추진해 왔고 여러 지역의 통신 선로를 광섬유 케이블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에 힘입어 전국적 컴퓨터 망 구축이 가능케 되었다. 그러나 인터넷은 아직 북한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기술적 경제적 문제 때문이 아니라 인터넷이 가져다 줄 파장을 우려해 북한 당국이 이를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안으로 거대한 Intranet (평양 내부 단위의 인터넷)을 구성하고 방화벽 (firewall)을 설치하는 것이 '평양 정보 센터'의 연구과제의 하나로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수일전 평양이 인터넷을 연결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어쨌든 국내 정보를 통제하면 남한에 대한 정보화의 격차를 확대 할뿐, 주민들을 각종 전파매체- 특히 남한의 위성 방송-에서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외 정보의 확산에 따라 북한 주민들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자각하게 되고 자유화, 민주화의 갈망이 높아져 갈 때 정부는 사상통제를 한층 강화하려 할 것이고, 자유화의 요구와 억압사이의 악순환이 계속 될 것이다. 결과 적으로 남북 경제 격차는 더욱 확대되고 통일의 지평은 더욱 멀어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의 대응> 이상의 분석이 시사하는 바는 바와 같이 남북 경협이 저절로 통일로 연결된다는 보장은 없다. 뿐 만 아니라 북한의 내부사정과 남북경협의 앞날은 매우 불투명하다. 지금 우리는 일종의 딜레마에 처해 있다. 북한 동포를 생각하면 경제 원조를 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나 경제협력이 과연 북한 동포를 빈곤과 압제에서 벗어 나게 하느냐 하는데 대하여는 확신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최근의 김정일 위원장의 개혁성향이 보이는 만큼 위에서 말한 첫째의 시나리오를 택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어쨌든 우리 정부는 광범위한 대북 경제원조를 약속하고 있으므로 몇 가지 대응방향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우리는 동포애의 견지에서 민생구호에 필요한 경제 원조는 계속 해야 한다. 북한 동포의 처참한 기아상태를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둘째로 우리는 상호주의를 통하여 평양의 개혁 개방 노력을 유도하고 지원해야 한다. 상호주의란 1대 1로 주고 받자는 것이 아니라 교류협력의 궁극의 목적과 원칙에 따라 평양의 개혁 개방의 진전을 보아가면서 협력의 범위와 방법을 선택하자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쉽지가 않다. 우리 정부를 가볍게 보는 평양은 개혁-개방을 권고하면 그를 선의로 받아 드리지 않고 내정간섭으로 반발할 공산이 크다. 그러나 정부는 경제협력의 목적과 원칙을 고수하는 주체성을 보여야 한다.

셋째로 우리의 힘만으로 평양의 개혁-개방을 유도하기 어려운 만큼, 평양을 국제사회로 이끌어내서 우방들의 영향력이 평양에 미치도록 해야 한다. 북한이 세계은행, 아시아 개발은행, IMF 등 국제기관의 멤버가 될 수 있도록 우방들의 지원을 요청하는 동시에 우방과 평양과의 수교를 장려하고 가급적 많은 외국 공관들이 평양에 상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들 우방 및 국제기관과 공조관계를 유지하면서 북한에 경제원조를 하는 동시에 그를 통하여 평양의 개방과 개혁을 촉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현 정부의 외교 정책이라고 생각되는데 대북 전략의 관점에서 현명한 정책이다.

넷째로 대북 경제 협력은 남한 자신의 경제력과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지금 우리 자신이 경제적 난국에 처해 있고 북한을 도울 수 있는 여력이 크지 않다. 북한이 국제금융기관에 가입하면 그로부터 다소의 재원을 얻을 수 있겠으나 그 만으로는 엄청난 재원 소요를 충족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필자는 일찍부터 동북아개발은행의 설립을 주장해 왔는데, 동 은행이 설립되면 재원 조달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대북 경제정책을 추진함에 있어서 다국적 접근이 용이해 진다.

다섯째로 정부는 민간투자의 길을 열어주되 감상적으로 그것을 장려할 것이 아니라 냉철하게 북한의 투자환경을 관찰하여 그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민간기업이 어디까지나 자기 책임하에 투자 활동을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 투자가 실패할 경우 정부정책에 협력하기 위해 했다는 구실 하에 어떠한 보상을 요구하게 되면 정부 실책과 국민 부담의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여섯째로 평양이 체제의 모순을 해결하는 데에 실패할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기 어렵다. 우리는 동독 인민이 처음에는 민주화를 요구하다가 나중에는 서독을 바라보고 통일을 절규하게 된 사태를 참고로 해야 한다. 김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흡수통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김 대통령의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다. 남한 국민들도 평화적이고 질서 있는 통일이 최선이라고 믿고 있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 대비책의 으뜸은 강력한 안보태세와, 강력한 경제력, 특히 서독의 경우처럼 국제수지 흑자를 축적하는 일이다.

끝으로 남북의 지식인들 사이의 지적교류를 도모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북한의 지식인들이 자타(自他)의 체제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환경에 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필자는 최근 평양을 다녀온 한 유럽 국가의 교수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동 교수가 김일성 대학 교수에게 사회과학 계통의 교과서를 만들 때 외국의 문헌을 참고하느냐고 물었더니 “우리는 김일성 수령의 위대한 교시가 있으므로 외국 문헌을 참고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하더라 는 것이다.

생각컨대 인간사회의 근본 문제는 빵과 자유의 문제이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빵과 자유의 문제 어느 것도 만족스럽게 해결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양자를 양립 시킬 수 없는 체제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이에 반하여 자유민주주의는, 비록 한 나라의 문화와 역사적 배경에 따라 그 내용을 달리 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빵의 문제 해결과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의 신장을 가능케 하는 체제라는 것이 오늘의 보편적 인식이다. 우리가 평양에 바라는 것은 21세기 세계 진운(進運)에 참획하기 위하여 그들의 지도이념을 재구성했으면 하는 것이다. 새로운 지도이념이란 반드시 자본주의를 따르라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혹은 시장경제는 장점도 있고 결함도 있다. 시장경제의 효율과 사회적 형평을 동시에 추구하는, 이른바 경제논리와 정치논리의 통합이 21세기 국가들의 공통적 과제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때에 평양은 이념 재구성의 좋은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맺음 말> 결론적으로 평양이 체제의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남한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경제협력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고, 북한 동포가 보다 행복해 질 수 있는 동시에 남북 통일을 앞당기는 기본 조건이라는 것을 북한 지도자들에게 설득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지금 검정일 위원장에게 이점을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김대중 대통령  밖에 없을 것 같다. 김정일 위원장이 서울에 온다 하니 김 대통령은 이점을 설득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끝

  

 

  1. 자료:삼성경제연구소; 한국무역협회
  2. 문화혁명을 적극 지원; 69년 9전대회에서 중앙위 부주석으로 모택동 후계자로 명시; 71년 9월 黃永勝, 吳法憲, 아들 林立果등과 반모 쿠테타 실패이후 외몽고에서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다.
  3. U.S. Library of Congress Country Study: China
  4. 중국 민주화 운동에 관하여는 별고 “북한, 제2의 중국이 될 수 있는가?”에 보다 상세한 설명이 있다.
  5. 이밖에 이일철 (李一哲), 왕희철(王希哲), 서문립(徐文立)등도 유명한데 1981년 봄에 체포되었다.
  6. 長谷川慶太郞, 21세기를 움직이는 대원칙, (PHP 연구소, 동경 2000),pp.172-3
  7. 일본 [문예춘추] 12월호
  8. 박찬모 [평양을 읽는다] 정보통신사업 실태, 중앙일보, 2000년 12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