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이념적 갈등과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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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중국 전문가 아니지만 북한이 제2의 중국이 될 것이다 라는 말들이 있기에 쓴 것이다. 이 논문은  남북경협과 통일의 조건 에서 요약 또는 전재 되고 있다. ( 2001년 3월 1일).


<머리 말- 변화의 조짐 >

최근 김정일 노동당 총비서가 “낡은 관념을 버리고 새로운 사고방식, 새로운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하여 신사고론을 제기하는 가 하면 1월 15일부터 20일까지 정부 고위 인사들을 대동하고 비공개리에 중국을 방문하여 개혁.개방의 본거지인 上海와 외국 합작 기업이 모여있는 浦東 공업단지를 두루 살펴보고 큰 충격을 받고 돌아 왔다고 한다. 이것을 보고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이 큰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면서 "북한이 중국의 개혁과 개방에 큰 관심을 갖고 `제2의 중국'을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평한 바 있다.

북한이 “제2의 중국”을 지향한다는 것은 단적으로 공산주의 독재체제를 유지하되 개혁과 개방을 통해 인민들의 경제활동의 자유의 폭을 점차적으로 넓혀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러시아가 민주화의 방향으로 정치개혁에 먼저 손을 대었다가 것 잡을 수 없는 경제적 혼란을 가져온 사례를 참고한다면 중국의 개혁방식은 평양이 따를 만한 모델이 된다. 그러나 북한이 중국의 모델을 따르기로 한다면 중국의 개혁 개방과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 났는지 알아 볼 필요가 있다. 본고(本稿)의 목적은 중국이 1978년 개혁 개방에 착수한 이후 일어났던 이념상의 갈등과 민주화운동을 개관하고 그것이 북한과 남한에 무엇을 시사하는 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 권력구조의 개편 >

먼저 중국에서는 毛澤東 체제에서 개방과 개혁을 추구하는 鄧小平 체제로 이행하는 정치권력구조의 개편이 있었다. 1978년 중공 11기 3중전회는 중국역사의 전환점을 이룬다. 문화혁명 10년(1966-76)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고 계급투쟁대신에 경제발전을 당의 목표로 삼고, 정치, 경제, 사회 체제 전반의 개혁을 추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어서 정치권력은 화국봉(華國鋒))을 비롯한 모택동 체제에서 양상곤(楊尙坤) 호요방(胡耀邦), 조자양(趙紫陽), 이붕(李鵬) 등의 등소평(鄧小平) 체제로 개편되었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체제의 출범에는 모택동 30년의 평가와 잘못된 과거사의 청산이 필요하다고 해서 1980년, 35명의 판사로 구성되는 특별재반소를 설치하여 4인방(幇)과 림표 (林彪)1 일당 (6명) 을 심판하고 2만 여자의 유죄 판결문을 선고하는가 하면, 3만5천자에 달하는 [중국인민공화국 창건 이후 우리당의 역사에 관한 약간의 문제에 대한 결의]를 채택하여 과거청산에 매듭을 짓고 4대 현대화 사업 (2000년 까지 농업, 공업, 과학기술, 국방등 4개 분야의 현대화를 목표로 함)을 출범시킨 것이다2.

북한에서 과연 이러한 권력구조의 개편과 과거사의 청산-이것은 남측과도 관련되는 문제이다-이 일어날지 예측 할 수 없는 일이다.

<진보와 보수의 갈등 >

둘째로 중국은 경제적 진보주의와 정치적 보수주의 사이의 격렬한 충돌을 경험하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등소평은 四項政治基本原則을 제시하였는데 그 내용은 (1)사회주의 견지 (2) 민주적 專制 (3) 공산당의 지도 (4) 맑스 레닌주의 및 모택동 사상의 견지이다. 즉 경제면에 있어서는 국제사회에 대한 문호개방과 시장경제의 도입을 추진하되 정치면에 있어서는 모택동 이래의 일당 독재체제를 유지한다는 것이 그의 기본 노선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2원주의 때문에 상기 4원칙을 지지하는 혁명 제1세대의 보수파와 경제 개혁과 정치개혁의 병행을 주장하는 제2세대의 개혁파 사이의 충돌이 일어났고, 그것은 마침내 1989년 6월의 천안문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등소평은 한 때 자기 후계자로 지목했던 호요방과 조자양을 민주화 세력에 동조하였다 하여 자기 손으로 숙청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그 경위를 요약하면 대략 아래와 같다3. 먼저 호요방은 고르바쵸푸의 페레스트로이카에 고무되어 장노정치의 폐단을 통렬히 피판하고 당원 간부의 부패 문제를 거론하여 장노들의 제일선으로 부터의 퇴진을 요구 하고 심지어 등소평의 은퇴까지도 암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군부의 세대교체를 추진하여 군 간부의 평균 연령을 65세에서 57세로 낮추는 한편 부패 척결과 당정분리를 실현하는 정치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장노 보수파는 이에 반기를 들고 “부르죠아 사상과 자유의 침투를 허락해서는 아니된다” 고 주장하고 나섰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군과 당 내부의 분열을 우려한 등소평은 노장 보수파의 손을 들어 주었다. 즉 1986년 12월에 개최된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에서 호요방은 군 노장들의 총공격을 받고 사실상 실각이 결정되었고, 87년 1월 16일 정식으로 사표가 수리되었다. 장노들이 내세운 표면상의 이유는 호요방이 1986년에 있었던 학생 데모 발생의 책임을 묻는다는 것이엇다.

1987년 1월 호요방의 뒤를 이어 조자양(趙紫陽)이 당총서기(대리)에 임명되었는데 조자양은 호요방(胡耀邦)과는 달리 해방전의 군의 경력이 없고 따라서 군벌을 움직일만한 힘이 없었다. 그러므로 등소평에게 기대지 않을 수 없었고 당 간부의 부패문제를 크게 거론할 수도 없었다. 그 결과 87년 10월 정식으로 당총서기로 임명 되고 중앙군사위원회 제1부주석을 겸하게 되어 등소평 다음의 제2인자가 되었다.

한편 조자양의 뒤를 이어 이붕(李鵬)이 국무원 총리가 되었는데 조는 경제개혁의 권한을 이붕에게 이양하지않고 정치개혁가 경제개혁의 정책 권한을 독점하였다. 그는 정치개혁 보다 경제개혁이 자기의 본령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은 이붕의 불만을 샀다.

그러나 87년 말경부터 중국의 경제가 악화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조자양의 브레인들은 쏘련의 붕괴와 동서 냉전의 종식에 따라 이념과 체제를 초월한 국제 상호교류의 시대가 도래했고 아시아 Nies들의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룩한 점에 착안하여, [국제경제순환론] 또는 [연해지구경제발전전략]을 제시하여 당 중앙정치국 전체회의에서 채택을 보기도 했다. 그것은 중국에 근접한 홍콩, 대만, 한국 등의 신흥 개도국과 중국의 연해지역을 하나의 국제경제의 분업구조로 통합하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체제상의 차이를 뛰어 넘는 발상이므로 사회주의 체제의 독자성과 우위성을 주장하는 노장파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이붕은 이 구상에 크게 반대하여 투자과열, 소비 과열이 경제파탄의 주인(主因)이니 국가통제에 의한 긴축이 사회주의 체제가 할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하여 조자양 계는 통제를 풀고 시장기능에 맡기는 것이 안정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조쟈양 주변의 학자들은 이른바 [신권위주의]를 들고 나왔다. 신권위주의는 미국의 정치학자 사뮤엘 헌팅톤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그 기본적인 논점은 중국에서는 분산된 정치권력의 할거(割據)가 정치, 경제 운영의 비효율의 원인이 되고 있고 오히려 정치적 민주화를 방해하고 있으므로 권력의 집중화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대만의 장개석과 장경국, 그리고 한국의 박정희와 전두환의 “개발독재”가 좋은 모델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신권위주의론]은 등소평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후술하는 바와 같이 1998년 4월 개혁주의자 호요방이 심근경색증으로 급사하자 그의 추모식을 계기로 천안문 학생데모가 발발하였는데 그 처리 방법을 놓고 조자양이 이끄는 개혁파와 이붕이 대변하는 보수파사이의 당론이 분열 되었다. 이점은 잠시후에 상론하겠거니와 등소평은 이붕, 양상곤 및 장노파의 편을 들어 천안문사건의 책임을 조의 실책으로 돌리고 그를 모든 직위에서 해임했다. 결국 등소평의 개혁 파라다임의 한계를 들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의 경험이 제기하는 문제는 개방과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경제개혁과 민주화를 지향하는 정치개혁을 어떻게 적절히 조화시켜 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그랬거니와 경제 발전에 상응하는 정치적 민주화를 도모하지 않으면 광주사태와 천안문 사건과 같은 비극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북한이 처음부터 경제개혁과 정치개혁을 병행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대 혼란을 가져오고 어느 쪽도 성공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양은 현 정치체제의 모순을 확실히 인식하고 민주화의 장래를 바라보고 개혁 개방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민주화운동4>

셋째로 천안문 사건이 진압된 후 1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그 동안 중국의 정치, 사회는 비교적 평온하고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면 중국에서는 정치개혁의 필요성과 동인(動因)이 없어진 것이냐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이 질문에 답하자면 중국의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잠시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는 1989년의 천안문 사건을 일과성의 돌발 사태처럼 보는 경향이 있는데 실은 그 배후에 끈질긴 민주화 운동의 역사가 있다.

중공 역사상 최초의 천안문 학생 데모는 1976년 모택동 사망(9월 9일) 이후 4인방 타도를 외치는 데모였다. 100만여명의 학생들과 시민이 천안문에 모였지만 유혈 사고는 없었고 동년 10월, 화국봉에 의한 4인방의 체포를 보게 된다. 당시 복권 된지 얼마 안 되는 등소평은 처음에는 학생 데모에 동정을 표시하다가 권력을 잡은 후에는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四人방 타도 후 민주화운동이 분출하였고 북경의 西單, [미주의 벽]에는 민주를 고취하는 격문(檄文)들이 붙고 있었다. 이 무렵 (1979년 3월 25일) 29세의 工員인 위경생(魏京生)은 [민주의 벽]에 “민주냐 아니면 새로운 독재냐?” 라는 격문을 띄고

“인민은 등소평이 독재자로 변신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의 행위는 이미 민주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옹호하는 것은 결코 인민의 이익이 아니다. 그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인민을 속이고 신임을 얻은 후 독재의 길을 실행하는 것이다”

라고 썼던 것이다. 그런지 4일 후, 3월 29일 그를 비롯한 민주운동가 들이 일제히 체포되어 魏京生은 15년형을 받았고 저명한 지식인들이 당적을 박탈 당했다.

문화 혁명이후 78년부터 79년 초에 이른바 [북경의 봄]으로 발전한 학생데모는 지성(知性)의 반란이라 할 수 있다. 중국에는 일찌기 손문 (孫文), 노신(盧迅)과 같은 위대한 사상가가 있었거니와 이 당시 직접적으로 학생들에게 영향을 준 것은 민주화운동을 전개한 지식인 들이었다. 그 중 저명한 이는 언론인 유빈안(劉賓雁), 상해의 작가 왕약망 (王若望), 그리고 물리학자 방여지(方勵之)등이다5. 이들 세 사람은 1986년 학생데모 때에 학생을 선동하였다 하여 당적을 박탈 당했다.

1986년에 일어난 제2차 천안문 데모는 호요방의 개혁투쟁을 지지하는 것인데 방여지 등의 민주화운동이 불을 질렀다. 그러나 이번에도 유혈사태는 없었고 호요방의 당총서기직 사임으로 일단락 되었다.

1986년의 학생 데모가 쉽게 진압되자 학생들은 자기들의 민주화 운동이 대중에서 고립되고, 지식인, 노동자, 시민과의 연대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반성하고, 대학내에 설치된 경관파출소의 감시에 불구하고, 은밀하게 재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후 2년 반 동안에 내외정세는 격변하고 있었다. 밖으로는 쏘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가 있었고, 동구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과 민주화 운동이 중국 지식인들을 크게 자극하였다. 안으로는 모택동 30년의 실패에 이어 기대를 걸었던 10년간의 개혁이 암초에 걸린 상태였다. 물가의 폭등, 노장 정치의 부패, 당원관료의 오직, 투기, 풍기문란 등으로 인심이 흉흉한 가운데 중국의 앞날이 절망적이라는 분위기가 번져가고 있었다. 홍콩의 한 신문은 이때의 사정을 “산에 비가 몰아 닥치고 집에는 강풍이 차 있다” (山雨至風樓滿)라고 표현하였다.

하기야 경제개혁의 성과가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개혁의 결과로서 농업생산은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외국투자와 공장건설이 여러 경제특구에 메아리치고 있었고 바야흐로 중국경제는 도약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반면 개혁개방정책의 전개에 따라 테레비, 전기세탹기, 전기냉장고가 보급되고 서방의 정보가 대중에게 침투하고 있었으며 특히 대만의 경제적 성공과 민주화 동향에 관한 정보가 대중에게 확산되는 것을 당국으로서도 어찌할 수 없었다.

이러한 때에, 위에서 말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천체 물리학자 방여지의 민주운동이 학생들을 더욱 고무하였다. 그는 1986년의 학생 데모 시에 당적을 박탈당하고 중국 과학기술 대학 부학장 자리에서 북경의 천문대 연구원으로 좌천 되었지만, 탄압에 굴하지않고 민주화 운동을 계속하여 중국의 사하로프 라는 별명을 얻고 있었다. 그는 외국 학회에 나갈 때 마다 강연, 대담 등을 통해 맑스-레닌주의를 통렬하게 피판하고 중국 정치체제의 개혁을 주장하는 동시에 등소평과 같은 노장세대가 죽어야 중국의 민주화기 실현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했다.

1989년 1월 6일, 그는 등소평에게 魏京生을 비롯한 정치범의 특사와 석방을 건의하는 공개장을 보냈다. 그런데 그 것이 도화선이 되어 지식인들이 일제히 궐기 했다. 즉 동년 2월 16일에 33인의 북경 문화계의 저명한 인사 (그 당시 유명한 사람은 모두가 공산 당원이다)가 방여지의 건의를 지지하는 공개장을 제출하였고, 2월26일에는 허양영(許良英)등 자연과학자 63명이 제2의 공개장을 제출하였고, 3월 14일에는 光明日報기자 재청(載晴) 등 청년 언론인 43명이 공개장을 제출하였다. 한편 국외에서는 2월17일, 미국 Princeton 대학 교수 여영시(余英時)등 63인의 저명한 중국지식인 들이 뉴욕에서 [중국민주촉진연락조]의 결성을 선언하고 방여지를 툭별조장으로 추대했다. 그들은 [중국대륙민주촉진선언]을 채택, “중국은 중국인의 중국이고 일당 일파의 사물(私物)이 아니다” 라고 선언하고, 미국, 캐나다, 구주, 홍콩, 일본 등 세계각국에서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상기 [선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사실이 증명하는 바와 같이 중국대륙과 같이 전제의 전통의 뿌리가 깊고 특권세력이 반근착절 (盤根錯節)하는 병적 사회에서는 경제정책상의 약간의 수정이 있더라도 정치체제상의 실질적 민주개혁을 수행하지 않으면 생산력 발전을 가로막는 족쇄의 속박을 제거할 수 없는 것이다.” 동[선언]은 민주개혁촉진을 위해 다음과 같은 5개항을 요구하였다. (1) 민영 신문잡지의 해금 (2)결사의 자유 보장, (3) 지방 수장 (首長)의 민선, (4)정치범의 석방, (5) 당정분리의 실행 등이다.

<천안문사건>

이러한 민주화 운동의 클라이맥스가, 1989년 4월 호요방의 사망을 계기로 발발한 천안문 사건이었다. 문제의 발단은 4월 26일 [인민일보]의 사설이었다. 이 사설은 학생의 민주화운동을 “동란”으로 규정하고 그 진압을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등소평의 의향을 반영한 것이었다. 등소평은 그 전날 양상곤과 이붕에게 민주화운동에 단호하게 대처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학생들은 자기들의 애국운동을 “동란”으로 규정한데 대하여 크게 반발하고 시위를 벌였는데 지식인들도 사설을 비판하였다. 이때 조자양은 4월 23일부터 평양을 방문 중이었고 따라서 사설 발표 결정은 그의 부재중의 일이었다. 조자양은 귀국한 다음 날, 30일에 그 사설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의견을 당내에서 발표하였다. 학생 데모는 점점 확대 되는데 당론의 분열이 생긴 것이다.

천안문 사건에 관련하여 지난 달(2001년1월), 당시의 당(黨)과 정부기관의 비밀 문서가 미국으로 밀반출되어 [The Tiananmen Papers]라는 책자로 출간 되어 큰 파문을 던지고 있다6. 이책의 원문 편자는 Zhsang Liang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신분을 감추기 위한 가명이고 영문 편집은 Columbia 대학의 Andrew J. Nathan 교수와 Princeton 대학의 Perry Link 교수가 맡고 있다. 중국 당국은 이책의 문서가 가짜라는 성명을 내고 있으나, 하여튼 이책에는 학생 데모에 대한 조자양과 장노파를 대변하는 이붕 사이의 시각차이와 조자양이 실각하는 과정이 생생하게 들어 나 있다.

이책에 나타난 조자양의 입장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6.24 인민일보 사설이 학생들 데모를 “동란”으로 규정하고 상해의 총서기 강택민이 동 사설의 뒤를 이어 상해의 World Economic Herald를 폐쇄한 조치는 성급한 반응이었고 오히려 학생과 지식인들의 봉기를 자극했다.
  2.  학생들은 당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부패척결과 정치개혁을 요구하고있는 것이므로 당의 노선과 일치하는 측면이 있다.
  3.  학생데모에 대한 근본대책은, “법치에 의한 민주주의, 개방, 투명, 대중에 의한 감시와 참여”를 지향하는 깨긋한 정부를 구현하기 위하여 경제개혁과 정치개혁을 병행하는 것이다. 국민에게 당의 정치개혁 푸로그람을 제시하고 실천하면 학생 데모는 일어나지 않는다.
  4.  당면 대책으로는 4-26 사설의 “동란”이라는 말을 공식으로 수정하고 당의 개혁의지를 천명하고 학생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노장파를 대변하는 이붕의 반론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4-26 사설은 그 초안을 미리 평양에 보내 조자양 당총서기의 사전 양해를 받은 것인데 지금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등소평 동지가 지지하는 정치국 상임위원회의 공식 견해이다.7
  2.  지금의 사태는 극 소수의 불순 분자들이 선량한 대다수 학생을 선동하고 외세에 영합하여 부르죠아 자유쥬의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고 그것은 등소평이 제시한 4개 원칙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3.  조자양 당총서기가 5월 4일 ADB 년차 총회 (북경) 에서 4-26 사설과 상반되는 요지에 연설을 하는 등 유화적인 발언을 한 것이 학생들을 고무하였고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4.  안정 없이는 어떠한 개혁도 추진할 수 없다.
  5.  조자양이 코바죠푸와의 면담에서 “중요한 결정은 등소평이 한다”고 말한 것은 현 사태에 관련하여 등 동지의 위신을 손상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쟈양의 수차에 걸친 설득에 불구하고8 5월 13일 학생들이 단식투쟁으로 돌입하자 조자양의 입장은 더욱 난처해 졌다. 당론 분열을 지켜본 등소평은 5월 17일 이붕의 주장을 지지하고 계엄령 선포를 시사한다. 그날 정치국 상임위에서 공식적으로 계엄령 선포를 논의 하게 되었는데 조자양은 계엄령의 선포는 사태를 더욱 악화할 뿐이라 하여 극력 반대하고 “학생데모의 성질에 관한 나의 견해가 등소평 동지와 이 자리에 참석한 대부분 위원들의 견해와 다른” 이상 나는 계엄령을 집행할 수 없고 따라서 사직할 수 박에 없다고 선언했다. 투표결과 찬반이 2대2로 갈라졌고 한 사람 은 기권했다9 . 결국 등소평과 장로회가 개입하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등소평은 21일에10 계엄령을 선포하고 강상곤이 진압 업무를 지휘하도록 결정 했다. 등소평의 판단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학생들의 반란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공산당을 타도하고 사회제도를 전복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서방측에 완전히 종속하는 부르죠아 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2.  개혁에 관해 당내의 의견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학생 반란을 어떻게 수습하느냐 하는 것이다. 계업령 선포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지 않은가?
  3.  외국에서 무어라 한들 그에 개의할 필요는 없다. 조속히 안정을 회복하고 경제 개혁과 서방에 대한 개방을 더욱 촉진해야 한다.

이리하여 양상곤의 지휘하에 6월 3일 천안문에 군대가 진입하였는데 그 다음 날 세계를 놀라게 한 유혈극이 벌어졌다. 물론 등소평은 유혈을 피하라고 지시했지만 일단 폭동이 어느 단계에 가면 학생이나 군대나 정부나 자기통제력을 잃고 마는 것이 모든 소요사태의 공통점이다.

전기 Tianenmen Papers의 편자 Zhang Liang는 “찬안문에 100만명이 참가했고 전국적으로는 근 1억의 인민들이 참가한 6.4항쟁은 20세기 전세계에서 가장 크고, 광범하고, 지속적이고, 영향력 있는 친 민주 데모였다.”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희생이 너무나 컸다. 북경시가 발표 한 바에 따르면 241명의 사망자 (그중 군인이 23명)와 약 7000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한다. (외국 신문들은 사망자 수를 약1400명 내지 약3000명으로 보도했다.)

천안문의 태풍이 지나간 이후 6월 23-4일에 개최된 제13기 4중전회에서, 이붕은 미리 준비한 조자양에 대한 징계 동의를 했고 조자양은 그에 대하여 조목 조목 반박 하면서 정치적 개혁 없이 당이 살아 남을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조자양이 학생 “폭란(暴亂)”에 가담하였다 하여 그를 모든 직위에서 해임하고 강택민을 후임 당총서기로 결정하였다. 등소평이 강택민을 택한 이유는 강이 학생 데모에 처음부터 신속 단호하게 대처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은 비교적 참신한 인물이라는 점을 고려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안문 사태가 진압되자 보안 당국은 수백명의 데모 주동자 및 민주 운동가들을 체포하였다. 방여지 교수는 신변에 위험이 닥쳐오자 처자를 끌고 미국대사관으로 긴급피난 했다. 중국당국은 신병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미국은 이에 응하지 않고, 미.중 외교관계가 긴장되었다. 방교수가 일년 동안 미 대사관에서 체류하는 사이 외교적 절충이 계속되었고, 그 결과 방교수 일가는 영국으로 출국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지금은 아리조나 대학에서 천체물리학을 연구하는 한편 중국 민주화 운동을 계속 하고 있다.

이리하여 천안문의 유혈극은 중국 경제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끼친 등소평의 정치경력에 씻을 수 오점을 남기었고 국제관계에 있어서 지금도 중국 정부를 괴롭히는 악몽이 되고 있다.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 지도부는 일부 학자들이 꾸며낸 반민주화 이론에 안주 하고 있는 것 같다. 즉 그들은 (1) 중국문화에는 민주의 전통이 없고 민주 정체도 수용되지 않는다. 일반대중은 민주에 대하여 흥미가 없고 설사 민주를 주더라도 수용능력이 없다. (2)경제발전에는 반드시 민주정체를 필요로 하지않는다. 전제정치가 아마도 경제 발전에 보다 유효하고 중국에 적합한 것은 정치상의 전제(專制)와 경제상의 자유이다.

그래서 중국 지도자들은 한국 박정희 대통령의 치적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고 한동안 [한.중 지식교류위원회]를 통하여 한국 경제개발 정책에 관한 정보를 열심히 수집했다. (중국측 위원장은 조자양과 친근한 마홍(馬 弘)씨였고 한국측 위원장은 필자였다.)

그러나 중국이 한국 경험에서 배워야 할 또 하나의 교훈이 있다. 그것은 자유주의 시장경제가 발전하면 민주화 세력이 성장하고11 마침내 정치적 민주화로 이행하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비단 한국 뿐만 아니라 싱가폴, 대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중국의 장래>

천안문 사건 이후 민주화 운동이 죽어버렸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많은 운동가들 (陳子明 徐文立 王希哲 沈良慶 王丹 王有才 등)은 형무소를 들락 날락 하면서 민주화 운동을 계속 하였고, 魏京生은 1993년 초에 석방되었으나 다시 인권문제로 정부를 비판하다가 재구속 되었다. 미국 및 서방세계의 압력으로 석방된 후 1997년 신병치료의 명목으로 미국으로 추방되어 지금은 뉴욕에서 민주화 운동을 위한 잡지 <北京之春>을 발행하고 있다.

당국은 특히 처치 곤란한 운동가들을 신변치료의 명목으로 가석방하여 미국으로 추방하였는데 미국에 망명한 운동가들은 1998년에 中國民主黨을 결성하여 王若望을 당수로 추대하는가 하면 自由中國聯合을 결성 하기도 했다. 한편 국내에서는 王有才가 야당인 '中國民主黨'을 결성하자 관계자들이 구속되는가 하면, 같은 해 운동가들이 조직한 '中國發展聯合會'는 북경에서 제1차 전국대회를 열기도 했다. 조자양 총서기의 일급 참모 였던 포우(鮑尤) 는 1999년 당 간부들에게 천안문 사태는 당의 실책이었음을 인정하라는 공개장을 보냈다. 앞으로 전기 [The Tiananmen Papers]의 중국어판이 나온다고 하는데 편자 Zhang Liang이 말 하기를 동문서를 출간하는 목적은 당이 덮어 버린 천안문 사건의 뚜껑을 다시 얼어 진실을 밝히고 당 자체에 의한 민주화를 촉진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민주화는 집권세력에 대한 투쟁만으로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개방과 시장경제의 침투 자체가 기성의 체제이념을 무력화 하는 또 하나의 동인(動因)이 되고 있는 것이다. 등소평의 경제개혁이 크게 성공하여 중국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등소평이 제시한 맑스-레닌 및 모택동 사상 견지의 원칙이 이미 사문화 된 것도 사실이다. 지금의 중국 공산주의는 이름 뿐이고 지도부 자체가 맑스-레닌주의를 믿지 않고 있으며, 다만 그것을 기득권 유지를 위한 방패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중국은 이미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넜고 지금의 변화의 방향 즉, 국제화, 정보화, 민주화의 방향을 거역할 수 없는 것이다. 필자가 만난 중국학자들은 무역을 개방하고 WTO에 가입 하면 이러한 추세는 더욱 촉진 될 것이라고 보고있다

정보화 또한 중국의 정치체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지금 중국에서는 인터넷 단말기가 이미 1400만대를 넘어 섰고 1999년 한해에 중국대륙에서 판매된 이동전화는 2000만대에 이르고 있다. 중국 공산당 제17회 전당대회가 개최되는 2002년에는 이동전화를 사용하는 인구가 1억에 달할 것이고 전인구를 12억으로 잡으면 12인의 한대 꼴의 보급 율이 될 것이라는 보고가 있다12. 지금 기술 발달(IMT)에 따라 인터넷을 휴대용 전화로 볼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는데, 인터넷과 이동 전화의 보급은 정부에 의한 정보통제 넷트워크의 붕괴를 의미 한다. 이동 전화와 인터넷을 통하여 세계적 스케일의 정보 교환이 이루어 질 때 중국인들의 세계관, 특히 자유와 민주화에 대한 각성이 높아질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중국 지도부가 이러한 추세에 어떻게 대응할지 알 수 없으나 이미 현실성을 잃은 공산주의 대신에 호요방, 조자양, 그리고 지식인과 학생들이 주장해 온 사회민주주를 새로운 국가이념으로 정립하고 점진적으로 정치개혁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중국의 경험이 시사하는 것>.

평양이 중국의 모델에 따라 어느 정도 개혁-개방으로 선회하여 남한과 외국으로부터 경제원조와 성장요인을 받아들이면 한 동안 비교적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고 따라서 민생이 호전 될 수 있기는 하다. 중국의 경험이 말해 주듯이, 개발초기에는 독재 정부가 능률을 발휘 할 수 있다. 거기에는 노사 분규도 없고, 집단 이기주의도 없고, 지가보상제도 없고, 정치 싸움도 있을 수 없다. 중앙 정부가 개발사업을 계획하고 결정하면 일사천리로 추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방의 결과로서 주민들이 외부 세계와 접촉할 기회가 많아지고 보다 많은 정보에 접하게 될 것이다. 독재 체제라 해서 정보화의 세계적 추세를 외면할 수는 없다. 평양을 다녀온 포항공대 박찬모 교수의 보고에 따르면13 평양은 96년이래 통신시설 보수, 전화의 자동화, 디지털화를 추진해 왔고 여러 지역의 통신 선로를 광섬유 케이블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에 힘입어 전국적 컴퓨터 망 구축이 가능케 되었다. 그러나 인터넷은 아직 북한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기술적 경제적 문제 때문이 아니라 인터넷이 가져다 줄 파장을 우려해 북한 당국이 이를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안으로 거대한 Intranet (평양 내부 단위의 인터넷)을 구성하고 방화벽 (firewall)을 설치하는 것이 ‘평양 정보 센터’의 연구과제의 하나로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수일전 평양이 인터넷을 연결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내외 정보의 침투에 따라 북한 주민들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자각하게 되고 자유화, 민주화의 갈망이 높아져 가면 주민들의 태도가 달라질 수 박에 없을 것이다. 독재는 풍선을 물속에 눌러 두는 것과 같아 손을 놓으면 물위로 튀어 오르게 마련이다. 케네디 대통령도 그의 유명한 취임 영설에서 독재는 호랑이 꼬랑지를 잡는 것과 같아 손을 놓으면 먹히게 된다고 했다.

평양이 이러한 위기를 어떻게 넘길지 예측 할 수는 없다. 중국의 천안문 사태나 그 이상의 파열을 경험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북한에서는 정부의 통제가 워낙 철저하고 무자비하기 때문에 민주화 운동은 전혀 불가능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일본의 한 잡지는14 1990년 이후 북한에서 일어난 24건의 크고 작은 폭동과 반란 사건을 열거하고 있다. 결국 인간의 이성은 말살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다음에 남한에서도 생각할 문제가 있다. 김 대통령은 화합과 교류의 목적은 남북간의 평화 정착이고 통일은 20년 혹은 30년 후에나 있을지 모르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 치더라도 교류의 목적과 방식은 언제나 통일 목표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면 아니 된다. 우리의 통일의 기본 목표는 두말 할 것 없이 한 반도에 자유 민주주의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남한에서는 이념의 갈등이 있다. 일부 학생과 지식인들은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국가이념을 의문시하는 발언을 서슴치 않고 하고 있다. 기묘하게도 남한에서는 북한을 비판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보수라 하고 북한에 동조하고 북한 독재체제에 관용적인 사람들을 진보라 한다. 그러나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중국에서는 호요방, 조자양, 그리고 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은 진보 세력이고 등소평을 포함한 노장파 들은 보수세력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남한의 일부 학생과 지식인들은 중국의 학생 과 지식인들과 정반대의 “민주화"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념과 정치체제의 통합이 없는 통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면 북한이 우리의 이념과 체제에 접근할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일까? 중국의 경험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우리는 위에서 중국에서 탈 공산주의의 방향으로 체제전환을 촉진하는 두 가지 요인을 보아 왔다. 하나는 지식인과 학생들의 집요한 민주화 운동이고 이것은 혁명 제1세대와 다음 세대사이의 세대교체가 이루어 짐에 따라 더욱 촉진 될 것이다. 또 하나는 국제화 정보화의 세계적 추세 하에서 시장경제의 확산 자체가 종래의 공산주의 이념을 사문화하고 현실과의 관련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대응 방향은 자명하다. 즉 경제 협력을 통해 북한에서의 시장경제 침투와 국제화, 정보화를 지원하되, 언제인가는 북한 내부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날 것을 예상해야 한다. 물론 지금은 정부가 북한 민주화를 거론할 처지에 있지는 않다. 그러나 남한이나 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주화 운동을 마치 통일운동의 방해자처럼 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예컨대 황장엽씨의 민주화 운동을 돕지는 못할 망정 그를 탄압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남한에서 이념에 갈등이 있는 만큼 대통령과 정치지도자 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의 국가이념을 천명하고 강조해야 한다

끝으로 중국의 경험을 보면 평양이 체제의 모순을 해결하는 데에 실패할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기 어렵다. 우리는 동독 인민이 처음에는 민주화를 요구하다가 나중에는 서독을 바라보고 통일을 절규하게 된 사태를 참고로 해야 한다. 김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흡수통일”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김 대통령의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다. 남한 국민들도 평화적이고 질서 있는 통일이 최선이라고 믿고 있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 대비책의 으뜸은 강력한 안보태세와, 강력한 경제력, 특히 서독의 경우처럼 국제수지 흑자를 축적하는 일이다.

<결론>

우리가 북한이 “제2의 중국”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다만 경제적 개방과 개혁을 통하여 경제발전을 촉진 하고 북한의 민생을 구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이 그를 통하여 자유민주의 정치체제로 이행하지 않는 한 통일의 조건은 성숙되지 않는다.

우리가 평양에 바라는 것은 21세기 세계 진운(進運)에 참획하기 위하여 그들의 지도이념을 재구성 했으면 하는 것이다. 새로운 지도이념이란 반드시 자본주의를 따르라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혹은 시장경제는 장점도 있고 결함도 있다. 시장경제의 효율과 사회적 형평을 동시에 추구하는, 이른바 경제논리와 정치논리의 통합이 21세기 국가들의 공통적 과제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때에 평양은 이념 재구성의 좋은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요컨대 평양이 체제의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남한 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의 경제협력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고, 북한 동포가 보다 행복해 질 수 있는 동시에 남북 통일을 앞당기는 기본 조건이라는 것을 북한 지도자들에게 설득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지금 검정일 위원장에게 이점을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김대중 대통령 뿐이 아닌가 한다. 김정일 위원장이 서울에 온다 하니 김 대통령은 이점을 설득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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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문화혁명을 적극 지원; 69년 9전대회에서 중앙위 부주석으로 모택동 후계자로 명시; 71년 9월 黃永勝, 吳法憲, 아들 林立果등과 반모 쿠테타 실패이후 외몽고에서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다.
  2.  U.S. Library of Congress Country Study: China
  3.  加美光行, 현대중국의 예명, -천안문 사건가 새로운 지성의 태두, (동경, 學陽書房, 1990)
  4.  본항은 주로 方勵之, 中國의 失望과 希望, 末 吉作 역, (學生社 동경, 1990)을 참조하였음.
  5. 이밖에 이일철 (李一哲), 왕희철(王希哲), 서문립(徐文立)등도 유명한데 1981년 봄에 체포되었다.
  6.  The Tiananmen Papers : The Chinese Leadership's Decision to Use Force Against Their Own People, compiled by Liang Zhang ,and edited by Andrew J. Nathan and Perry Link, with an Afterwords by Orville Schell, (Public Affairs, New York, 2001)
  7.  이에 관하여 평양에 보낸 초안과 신문에 실린 내용이 다르다는 설도 있으나, Tiananmen Papers에서는 조장양이 그 점에 관하여는 자기도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고 있다.
  8. 5월 19일 조장양은 개엄령과 자기의 운명을 예측하고 단식중의 학생들에게 눈물로 호소했다. “내가 너무나 늦게 왔다. ….학생들도 늦기 전에 이 자리를 떠라" 라는 그의 연설은 청중을 울렸다 한다.
  9. 개엄령 찬성은 이붕, 姚依林, 반대는 조자양 胡啓立, 기권은 喬石이었다.
  10. 비밀누설을 고려하여 20일로 앞당겨 졌다
  11. 중국인의 가치관의 변화에도 이점이 나타나있다. Tamotsu Sengoku & Din Qian, Social Values and Life Style in China Today, (The Simul Press, Tokyo, 1992)
  12.  Hasegawa Ryutaro, 21시기 일본을 움직이는 대원칙, PHP 연구소, (동경, 2000)
  13. 박찬모 [평양을 읽는다] 정보통신사업 실태, 중앙일보, 2000년 12월 5일
  14. SAPIO, 1997년6월25일 호, 동경, 小學館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