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해에는 자신과 희망을 갖자.


중앙일보  2001년 1월 1일 제5면, ‘그래도 우린 옳은 길로 가는 중’이라는 제목의  특별기고이다. 편집자가 자구 수정을 해 준 것은 고마우나 지면 관계로 약간의 삭제가 있었던 것은 유감이다. 여기에는 신문사에 보낸 원고 (자구 수정) 그대로를 싣는다. 필자의 뜻을 보다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서 이다.  


지난 해가 저물어 갈 때 매스컴이 쏟아 내는 뉴스에는 밝은 면이 거의 없었다. 경제면도 그렇고 정치, 사회면은 더욱 그러했다. 지난 해에 밝은 면이 있었다면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과  노벨 평화상을 들 수 있는데, “총체적 위기” 속에서 그것 마저 빛을 잃었고, 집권당은 난국 수습의 가닥을 잡지 못하고 내분에 휘말리다가, 드디어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국정개혁을 단행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대통령의 결단이 앞으로 난국 타개의 전기가 되기를 빌 뿐이다.  

이제 2001년을 맞이했는데, 새해 아침에 생각해 볼 일이 있다. 우리는 어두운 면에 시선을 집주(集注)하는 나머지, 있을지도 모를 밝은 면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단기적인 현상에 집착하여 장기적 추세를 통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오늘은 어두운 면을 잠시 덮어두고  밝은 면을 조명해 보기로 한다. 새해에는 좀 더 자신과 희망을 갖고 출발하자는 뜻에서 이다.

필자는 오늘의 난국을 三化의 물결, 즉 정보화, 세계화, 민주화라는 세가지 역사적 파장에  적응하기 위한 진통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그 동안 진통을 겪으면서 무슨 변화를 가져왔는지 돌이켜 보자.

<정보화> 먼저 정보화의 측면을 보면 지금 정보 산업이 수출과 경제성장을 주도하고 있다. 작년에 정보산업은 40% 이상의 성장률을 보였다. 반도체 생산은 세계 제1위, 통신기기와 컴퓨터 생산은 각각 세계 제7위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 주간지 Time (2000/12/11)의 특집 보도에 따르면 인터넷을 사용하는 인구 비율은 대만의 18%, 홍콩의 17%, 일본의 14%, 중국의 0.7%에 비하여 한국은 34%, 초고속 인터넷를 사용하는 인구수도 일본의 45만명, 미국의 600만에 비하여 한국은 300만이고, 놀랍게도 한국이 세계 제1위의 정보화률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정보화가 우리의 생활 양식과 생산방식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오고 있고 여러 가지 역작용을 일으키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정보화는 가야 할 길임에는 틀림이 없다. 몇몇 벤처 기업의 금융 비리가 우리에게 충격을 주고 있지만 그래도 벤처 기업들이 IT산업을 일으켜 온 것은 부인 할 수 없다.  

<세계화> 상품 및 용역 시장과 자본시장은 대부분 개방된 상태에 있다. 수입 개방에 따라 무역수지가 어떻게 될까 염려 했지만, IMF 사태이후 1998년부터 2000년 10월 까지 무려 795억 달러의 무역수지 흑자를 축적하였고 이것이 오늘 날 950억 달러의 외환보유고를 가지게 된 주인(主因)이다.

특기할 것은 금융부문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작년 8월말 현재 외국인이 보유한 국내주식의 시가총액은 전체의 30%(75조원)를 차지하고 있고, 주요은행의 외국인 지분률이 23% 내지 63%에 이르고 있으며, 외국인 한 사람이 최대 주주인 은행들이 국내 예금과 대출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제2금융권의 사정도 비슷하다. 비금융업 분야에 있어서도 외국인 직접투자가 98년부터 작년 8월까지 337억 달러에 달하였고 그를 통하여 국내기업을 매수하거나 경영에 참가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이제 외자계가 국내 금융시장과 경제의 향방을 결정하는 주도 세력으로 부상하였고 외국인이 자금을 회수할 경우 국내시장 불안이 심화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국제화에 대하여 반론도 있고 불안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국제화 없이 우리 금융과 기업경영이 구습에서 탈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 기업들이 다시 태어나 외국계 기업이나 은행을 逆으로 인수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경영면에서 국제화의 효험(效驗)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외국자본의 진출과 함께 정부, 금융기관, 기업, 사회단체들이 제도와 관행면에서 글로벌 스탠더드를 수용해 가고 있다.

예를 들면

  1. 말썽은 많지만 그래도 부실 금융기관과 기업의 퇴출과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다.
  2. 이사회가 주요 경영전략을 결정하고 기관장의 경영행위를 통제하는 관행이 나타나고 있다.
  3. 외형위주의 조직에서 성과중심의 조직으로 변화하고 있다.
  4. 이윤을 무시한 다각 경영을 지양하고, 경쟁력 있는 부문에 특화 하는 방향으로  돌아 서고 있다
  5. 기존의 회계기준과 감사 관행이 국제 기준으로 바뀌고, 경영정보를 공개하고,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는 노력이 보이고 있다.
  6. 개인의 성과에 따라 인사 및 보수체계를 정하는 기업들이 많아졌다.
  7. 금융기관의 리스크 관리, 신용평가, 여신관리 기법이 개선되고 있다.
  8. 상호지급보증, 상호 출자, 내부거래의 금지와 사외이사제 도입 등으로 재벌이 현대적 기업집단으로 변모하고 있다.
  9. 경쟁이 상품과 서비스의 질을 높이고 있고 대학에 까지 파급되어 고등 교육의 질을 높이고 있다.

하기야 상기의 변화들이 아직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야 할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민주화> 다음에 민주화에도 심한 진통이 따르고 있으나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재벌 총수의 독재체제도 사라져 가고 있고, 수직적 명령계통 대신에 네트워크 중심의 수평적 의사결정을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경영이 민주화 되어가고 있다.

노조의 투쟁이 구조조정의 걸림돌이 되고 있지만, 그래도 노조가 여론을 의식하여 경제 논리와 법을 따르려는 경향이 보이고 있다. 지하철 파업의 자제, 대우 노조의 구조조정 동의, 한전, 철도, 등의 파업 계획 철회 등이 그것을 말해 준다. 사용자측도 이제는 근로자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고 그들을 동반자로 인정하고 동고동락을 목표로 하고 있다.

민주와 자율의 경험이 없어 집단적 이기주의가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있지만, 의료 대란이 결국은 대화를 통해 타결되었음을 볼 수 있었다. 지방자치 초기에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있고 지역이기주의가 문제시 되고 있지만 입법으로 이를 조정할 수 있는 일이다.

민주적 방법에 의한 문제 해결은 원래 지루하고 답답한 과정이지만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의 방법이다. 강권을 사용하면 당장은 문제가 해결된 것 같지만, 과거의 쓰라린 경험이 말해 주듯이, 그것은 후환과 상처를 남기게 되고 항구적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영국의 수상 처칠이 의회에서 한 말이 있다. “모든 고귀한 것에는 대가가 있다. 자유는 고귀한 것이다.  故로 대가가 있다. 그 대가는 인내와  관용이다”

정치면의 민주화가 가장 뒤떨어져 있다. 민주적이고 생산적인 대의정치를 정착시키는 것이 대한민국의 4대 기본과제의 하나라고 필자는 말해 왔다. 4대 과제의 첫째는 자유민주 국가를 창건하는 것인데 그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지도력으로 실현되었다. 둘째는 조상전래의 빈곤에서 탈출하는 것이고 그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도력으로 이루어 졌다. 셋째의 과제는 이 나라에 생산적 대의정치를 구현하는 일인데 이것은 미해결의 문제로 남아 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넷째의 과제인 남북통일 문제에 도전하고 있는데 순서가 바뀐 탓으로 한계에 부닥칠 우려가 있다.

그러나 정치적 민주화에도 개선의 조짐이 보이고 있기는 하다. 정치자금 투명화, 부정부패 방지, 검찰의 정치적 중립, 당내 민주화, 선거후의 당적 이동, 날치기 통과 등 많은 문제들이 치열한 정쟁의 대상이 되어 왔는데, 언론, 시민 운동, 차세대 국회의원들의 분발에 의하여 결국은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해결될 것이다. 만약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면 평양은 남한의 정치적 치부(恥部)를 선전하여 “우리식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증명하려 할 것이다. 이것은 남북관계를 험난하게 하고 통일의 길을 더욱 멀게 하는 것이다.

<단기적 문제의 장기적 성찰>  위에서 단기적 비관론에 가려진 장기적 낙관론을 제시해 보았는데 아래와 같은 성찰이 필요치 않은가 한다.

  1. 시한에 집착하지 말고 경중과 선후를 가려가며 착실하게 구조조정을 완수해야 한다. 구조조정 방법의 결함으로 필요 이상의 대가를 치르고 있기는 하나 구조조정을 아니 할 때의 대가보다는 작다.
  2. 매운탕을 좋아하는 한국인 들은 모든 문제를 정부가 화끈 하게 해결해 주기를 기대 한다.  그러나 三化 시대에는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정부에게 그것을 강요하면 시장의 기능을 왜곡하고 강권주의와 정부규제를 자초하게 될 뿐이다. 모든 일을 가급적 자율과 시장기능을 통해 해결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3. 민간이 자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면 대화와 타협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 문제 해결에는, 논리에 승복하고, 자기 뿐만 아니라 전체의 이익을 고려하고, 장기적 이익을 위해 단기적 손실을 감내하는 지혜가 필수조건이 된다.
  4. 정부의 일차적인 임무는 시장 참여자들의 게임 규칙 (Rule of Game) 을 만들어 주고 그를 엄정히 집행하는 것이다. 법치주의가 통하지 않는 곳에 정의와 기강이 설 수 없다.
  5. 끝으로 三化 시대의 지도자는 자신의 목표보다 국가의 목표를 앞세워야 한다. 때와 장소에 따라 듣기 좋은 말을 한다고 해서 리더십이 발휘되는 것은 아니다. 지도자는 문제의 정체를 파악하고, 문제해결의 시스템을 만들고, 그를 구성하는 조직을 충분히 가동하는 동시에 조직에 막힌 곳이 있으면 뚫어 주고 서로 얽힌 곳이 있으면 풀어주는 해결사의 역할을 해야 한다. 대통령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난국은 단기적인 현상이다. 거시적으로 보면 우리는 가야 할 방향으로 가고 있다. 좀 더 잘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적지는 않다. 그러나 불과 30년에 이 나라를 세계 제 12-3위의 경제 대국으로 만든 우리가 三化 시대의 도전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은 두려움 자체이다". 새해에는 자신과 희망을 갖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