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主敵'을 생각한다


2000년 12월 18일 중앙일보(5면)에 게재   


 국방부의 국방백서가 북한을 주적으로 규정한데 대하여 북한이 반발하고 나섰다. 우리가 알기에는 주적은 군사 용어이고 주적의 개념 없이 국방정책을 정의할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북한도 막강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고, 그것이 남한을 주적으로 겨냥하고 있다는 것은 말 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평양이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은 용어의 문제이지 사실상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6.15 공동성명에 따라 남북간의 화해 협력이 강조되고 있는 이때에 북한을 '주적' 이라고 표현하는 데에는 어색한 감이 없지 않다. 그러므로 주적 개념을 재정의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즉 북한을 우리의 주적이라고 하는 대신 "우리의 자유 민주체제와 안보에 중대한 위협을 주는 세력”을 주적이라고 하면 되는 것이다.

필자의 이러한 제안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남북관계를 생각할 때 우리는 북한 동포와 북한 정권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북한의 동포는 영원한 것이지만 정권은 영원할 수가 없다. 남한에서 국민은 영원하지만 정권은 자주 바뀌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분명히 북한 동포의 대다수는 우리의 주적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우리의 주적" 이라고 하면 북한 동포가 섭섭해 할 것이고 우리 군의 병사들도 헷갈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필자의 새로운 정의에 따르면 이러한 문제는 해소된다.

둘째로 국방의 목적에는 숭고(崇高)한 이념이 있어야 한다. 국가 유사시에 목숨을 걸고 적과 싸우는 것이 국군의 의무인데 군인들이 자기의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모르면 싸울 용기가 나지 않을 것이다. 즉 강한 군대는 강한 이념을 필요로 한다. 6.25 당시 20만 장병들은 공산침략을 저지하기 위하여 대한민국에 그들의 고귀한 생명을 바쳤는데 당시의 그들의 가치관은 분명했다. 즉 '반공통일’이 그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체제 공존과 화해 협력을 강조하는 지금에 있어서는 "반공"의 명분으로 군인들의 가치관을 통일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제는 보다 명확한 가치관을 부여해야 한다. 그것은 물론 우리의 국가 이념에 관한 일이다. 즉 자유민주주의는 우리 나라의 정체성의 근본이자 지구촌의 보편적 가치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국민이나 군인들이 목숨을 걸고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지금은 군인들에게 단순한 ‘반공’ 대신에 자유민주주의 신념을 심어주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도 주적의 개념을 재고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한다.

셋째로 국방의 개념도 국제화 되어 가고 있는데 필자가 제안하는 주적 개념은 어떠한 단일 국가를 지칭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UN 결의에 따라 동티모르에 군대를 보내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을 중시하는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국제적 노력에 동참하기 위한 것이고 그러기에 우리 장병들은 긍지를 가지고 출정하였다. 앞으로 국제적 분쟁 또는 지역적 전쟁위협에 대처하기 위하여 자유민주 국가들이 공동대처해야 할 일이 많아질 것이다. 이러한 경우 우리가 동참할 명분은 자유민주주의 수호밖에는 없는 것이다. 대항해야 할 대상이 主敵은 아니더라도 대항할 명분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도 주적 개념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위에서 군인들에게 자유민주주의 신념을 심어주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이해한다는 것은 보기보다는 쉽지가 않다. 인간사회의 대부분의 문제는 빵과 자유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공산주의는 빵과 자유의 문제의 어느 하나도 해결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양자를 양립 시킬 수도 없는 체제라는 것이 증명된 반면, 600년의 역사를 가진 자유민주주의는 빵의 문제를 해결하고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의 신장을 가능케 하는 체제라는 것이 오늘의 보편적 인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대북정책의 변화를 계기로 하여 이념상의 갈등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와 인권을 신봉하는 지도자와 지식인들은 비단 군인들 뿐만 아니라 국민 일반에 대해서도 국가이념을 적극적으로 계도해야 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