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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이념을 강조하는 것이 소모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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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5월 21일 중앙일보 칼럼에 '국가이념 분명해야'로 제목이 변경되어서 게재.


  

어느 대통령 후보는 경선 과정에서 이념논쟁은 소모적이라는 말을 했고 관훈 클럽 토론회에서도 "자유민주의를 강조하는 것이 소모적인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그렇다고 답변하였다. 그가 "소모적” 이라고 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는 천지개벽이 없는 한 보편적 질서인데 결론이 난 문제”를 갖고 논쟁하면 소모적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자유민주주의로 통일하겠다면 흡수통합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내는 것인데, 내가 대통령이 됐을 때 북한과의 관계에서 남북관계를 풀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통령 후보가 이러한 말을 한데 대하여 당혹감을 금할 수 없다.

먼저 첫째의 대답에 대하여 동 후보의 인식을 수긍하면서도 중요한 현실을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동 후보의 말과 같이 우리의 국가 이념인 자유민주주의는 지구촌의 "보편적 질서로 결론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사회에는 이념상의 "남남 갈등"이 있고 그것이 각종 정치, 사회문제에 투영되고 있다. 그렇다면 대통령 후보는 마땅히 이념 갈등의 원인과 그 내용에 관하여 자기의 소신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

국가이념은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국민적 통합의 구심점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제아무리 강조해도 소모적일 수는 없는 일이다. 참고로 미국에서는 지금까지 38인의 대통령이 나왔는데 그들은 취임 연설은 물론 기회 있을 때마다 한결 같이 국가이념을 최고의 가치로 선양해 왔다. 작년의 9-11 테러가 발생했을 때 "Melting Pot” (도가니 탕)의 이 나라가 무서운 단결력을 보여 준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국가이념이 분명치 않으면 국민적 통합은 불가능하다.

이점에 관련하여 일부 논자들은 냉전시대의 자유민주와 지금의 자유민주의 개념은 같지 않다고 한다. 하기야 유럽에서 볼 수 있듯이 자유민주의 정책적 내용이 좌파와 우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자유민주의 핵심인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자유선거를 통한 지도자의 선출, 인권중시 등의 보편적인 가치를 부정하는 정당이나 나라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기본적 자유가 없는 체제를 북한에 두고 있는 현실 때문에 그에 대한 대응에 고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6.25 이후 지금처럼 자유민주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가 절실히 요구되는 때는 없었다. 지금 우리의 정치적 현실은 참담하고, 언론의 자유가 논란의 대상이 되는가 하면, 집단적 이기주의와 무질서가 판을 치고, 교육이 황폐화하고, 불신과 갈등이 사회를 뒤 덮고 있다. 이러한 때이니 만큼 대통령 후보는 마땅히 정치적, 사회적 환부를 치유하겠다는 공약과 함께 우리사회의 모든 취약점에도 불구하고 왜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야 하는가를 국민에게 알기 쉽게 설득할 수 있어야 하고 또 해야 한다. 그것은 소모적이 아니라 필수적인 책무이다.

다음에 자유민주를 내세우면 남북관계를 풀 수 없다는 말도 이해하기 어렵다. 평화적 통일이란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남북의 내부적 변화에 의한 통일을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성공 여부는 결국 남북 주민들의 선택과 결의에 달려있다.

그러나 북쪽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지는 너무나 명백하다. 적어도 중국의 경우와 같이 권력구조를 개편하고 개혁 개방의 방향으로 체제 전환을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 국제적 공론이다.

햇볕정책은 북과의 대화와 협력을 통해 그것을 유도해 보자는 것인데 그렇게 하자면 협력 방법에 관하여 북의 체제 상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예컨대 북한의 식량 문제를 논의 하자면 북의 국영 농업 체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대화에서 직설적으로 우리의 이념적 입장을 내세우라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하고 예의를 갖추는 것은 외교의 상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 까지나 외교적 기법(技法)에 속하는 문제이지 우리의 원칙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원래 협상이란 각자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상호 접근할 수 있는 것이지,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속임수를 써서는 성공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상대방 체면 때문에 협상의 원칙을 저 버리면 협상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호해지고 국민들의 불신을 사게 된다.

요컨대 대통령이 북의 눈치를 보고, 이념 논쟁을 방관하는 태도를 취한다면 그것은 대통령의 임무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고 국민적 통합을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다. (2105자)